聖가를로, 聖女라파엘라 마리아 포라스님..등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카롤루스의 원래 이름은 요한 카롤루스 마르치오니(Joannes Carolus Marchioni)인데,
그는 이탈리아의 세체에서 가난한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 목동이 되었다가
사제가 되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읽고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그의 보잘 것 없는 학력 때문에
나지아노에서 수사가 되어 그때부터 부엌, 문지기, 정원 등등 수도원의 허드렛일을
도맡다시피 하였지만, 그의 높은 성덕과 단순성 그리고 애덕은 놀라울 정도여서
주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신비적인 서적도 몇 권 기록했고, 더할 수 없을 정도로 금욕생활을 하였으며,
1656년에 발생한 흑사병 유행 때에는 참으로 영웅적으로 주민들을 도와 그의 위대성이
더욱 돋보였다. 그의 가족명은 원래 멜키오르이나 그는 세그레의 카롤루스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1959년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
예수 아기를 예배하기 위하여 동방에서 온 현인 세 사람에 관한 기록이
마태오 2장 1-2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헤로데로부터 아기 나실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고,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하고
별을 따라 가서 아기를 찾아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 꿈에 헤로데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고대의 전승에 의하면 이들은 현인(Magi)들로서 성 발타사르(Balthasar), 성 가스파르
그리고 성 멜키오르(Melchior)라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그들이 바빌로니아(Babylonia)나 아라비아(Arabia)에서 온 점성가들로 믿고 있다.
☞ 9, 10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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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
라파엘라 마리아 포라스(Raphaela-Mary Porras) |
축일 |
1월 6일 |
성인구분 |
성녀 |
신분 |
설립자 |
활동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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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연도 |
1850-1925년 |
같은이름 |
메리, 미리암 | |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Curdoba)의 페드로 아바드(Pedro Abad)에서 태어난
성녀 라파엘라 마리아 포라스(Raphaela-Maria Porras)는 그곳 시장의 딸인데,
불행하게도 4살 때에 부친을 잃었다.
성녀 포라스와 그녀의 자매인 돌로레스(Dolores)는 마리아 레파라트리스 수녀회(the Sisters of Marie Reparatrice)에 입회했으나, 그곳의 주교가 교구를 떠나도록 강요함으로써 성녀 라파엘라와
15명의 다른 자매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꾸몄으며, 첫 서원을 할 즈음에 또다시 새로운
규칙을 제시하므로 할 수 없이 마드리드(Madrid)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그들 자매들은 성심 시녀회(the Handmaids of the Sacred Heart)를 설립하고
어린이 교육과 피정지도를 하였다.
이윽고 1877년에는 성좌의 승인과 더불어 성녀 라파엘라가 총장이 되었고,
수녀회는 에스파냐에서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녀는 1893년에 총장직을 사임하고 32년 동안이나 로마의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1977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
캐나다 몬트리올(Montreal) 근교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난
안드레아 비제트(Andreas Bissette)는 청년이 될 때까지 뉴잉글랜드(New England)의 이곳저곳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몬트리올로 가서 1870년 성 십자가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67년간 평수사로서 참으로 놀라운 삶을 살았다. 그는 수도원의 문지기, 정원사
그리고 그를 만나러 몬트리올까지 오는 순례자 접견 등으로 수도 생활을 마쳤다.
어릴 때부터 성 요셉(Josephus)께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그는 성 요셉 신심 보급에
진력하였고, 몬트리올에 성 요셉 오라토리움(Oratorium)을 세웠다.
그가 운명할 즈음에 이 성당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경당으로 손꼽혔다.
1982년 5월 2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그를 시복하였다. |
성 에르미놀드는 어려서 독일 히르사우(Hirsau) 수도원에 버려졌기 때문에 일생동안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구김살 없이 성장하여 수도자가 되었으며, 매우 엄격한 규칙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덕을 닦았다. 이리하여 그는 독일 헤센(Hessen)의 로르슈(Lorsch) 수도원 원장으로 발탁되었으나 선거에 따른 잡음 때문에 1년 만에 사임하고 말았다.
1114년 밤베르크(Bamberg)의 성 오토(Otto, 7월 2일)의 주선으로 그는 프뤼페닝의
새 수도원으로 가서 훌륭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 지방의 교회력에는 성 에르미놀드가 순교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부당한 사건으로 인하여 운명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기도 정신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였다.
사후에 그의 무덤에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에르미놀두스(Erminoldus)로도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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