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9월23일(수) 聖 비오신부, 聖女 테클라님..등

H-Simon 2009. 9. 22. 09:07

 

 
9월23일(수) 聖 비오신부, 聖女 테클라님..등

         

               하느님,   

               성인 성녀님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주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저희를,

 

               아버지의 한 없으신 사랑으로 강복해 주옵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리나이다....아멘

 

                                   ****         ****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해당 번호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리노 Linus 9월 23일 교황,순교자   +79년?
2 베드로 Peter 9월 23일 순교자   +900년
3 비오(오상의)** Pius 9월 23일 신부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 1887-1968년
4 아담난 ** Adamnan 9월 23일 수도원장,저술가 이오나(Iona) 624-704년
5 안드레아 Andrew 9월 23일 순교자   +900년
6 안토니오 Anthony 9월 23일 순교자   +900년
7 요한 John 9월 23일 순교자   +900년
8 콘스탄티노 Constantine 9월 23일 성당지기 안코나(Ancona) +6세기
9 성녀 크산티파 Xantippa 9월 23일 사도들의 제자,동정 순교자   +1세기말
10 성녀 테클라** Thecla 9월 23일 바오로의 제자,동정 순교자 이코니움(Iconium) +100년경
11 성녀 폴리그세나 Polyxena 9월 23일 사도들의 제자,동정 순교자   +1세기말
총 11 성인

 

 

 

    ▶비오(오상의)(9.23)
 
성인명 비오(오상의)(Pius)
축일 9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활동지역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
활동연도 1887-1968년
같은이름 비우스, 피오, 피우스

 

                                         오상의 성 비오(Pius) 신부 유해 


   오상의 성 비오 신부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남동부의 베네벤토 대교구에 속한
피에트렐치나에서 아버지 그라초 포르조네와 어머니 마리아 주셉파 사이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출생 다음날인 26일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고,
어려서부터 매일미사에 참례하고 기도와 묵상을 즐겨하였다.
10살 때에 그는 사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부모에게 말하였고, 아버지는 아들의 신학교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일하러 갔다. 12살 때 첫 고해와 첫영성체를 한 그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마을의
사립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903년 1월 6일 16세의 어린 프란치스코 포르조네는 모르코네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같은 해 1월 22일 수련복과 함께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뒤 1907년 1월 27일에 종신 서원을 하였고, 1910년 8월 10일 23세의 나이로 베네벤토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품을 받은 후 1년 정도 지난 1911년 9월 7일 그의 두 손, 특히 왼손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18년까지 거의 매주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오상(五傷, stigma)의 흔적이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915년 10월 10일부터였다. 그는 오상이 보이지 않도록 해 주기를 예수님께 간청하였고 얼마 동안은 별 흔적 없이 지낼 수 있었다. 1915년 11월 6일 군에 소집되어 1918년 수도원에 복귀하기까지 성 비오 신부는 1년 혹은 6개월의 병가를 여러 차례 받았으며, 1918년 3월 16일 기관지염 때문에 군복무 불능 판정을 받고 3월 18일 산조반니 로톤도의 수도원에 복귀하였다.

   성 비오 신부는 1918년 9월 20일<31세 때> 그의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오상이 찍힌
것을 알게 되었다. 오상은 처음에는 작은 상처에 지나지 않았으나 몇 달이 지나자 점점 커졌고,
그 후 그는 아물거나 덧나지도 않는 오상의 고통을 50년 동안 겪게 되었다.
그가 오상을 받았다는 소문은 급속히 퍼져 산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성 비오 신부는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오해와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되었다. 1923년 6월 17일에<46세 때> 그는 수도원 내의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하되
외부인은 참례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고, 그에게 오는 편지의 답장도 금지당하였다.
미사는 6월 2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봉헌하게 되었으나, 그 뒤 교회의 제재는 몇 차례 되풀이되었다.
1931년 6월 9일에는 미사 이외의 모든 성무집행이 정지되었고, 미사도 경당에서 복사 한 명과
봉헌하도록 제한되었다. 이틀 뒤 이 명령을 전해들은 성 비오 신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순명하였다.
 
                           수원교구 남양 성모성지의 오상의 성 비오 신부상 모습입니다.

 


   격리된 기간 동안 성 비오 신부는 미사집전과 기도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가
1933년 7월 16일부터<56세 때> 다시 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4년 3월 25일부터 남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고, 5월 12일부터는
여자들에게도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다. 그는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애정으로 1947년 5월 19일에
'고통을 더는 집'라는 병원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 병원은 1956년 5월 5일에 완공되어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1960년 8월 10일 성 비오 신부의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축하식이 거행되었고,
1963년 1월 22일에는 수도복 착복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그리고 1968년 9월 20일 그의 오상 50주년을 축하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성 비오 신부는 1968년 9월 22일 오전 5시에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날인 23일 월요일 새벽 2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26일 지하성당에 안치되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충만한 성 비오 신부는 인간 구원을 위한 자신의 성소를 충실히 살았다.
그는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신자들을 영성적으로 지도하는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였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거행에 충실했으며, 특히 미사성제를 통하여 그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영성적인 충만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곧 삶이었다.
그는 모든 의지를 신앙 안에서 세웠고 모든 행실을 신앙 안에서 행하였다.
그는 열성적으로 기도생활에 투신하며 많은 시간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보냈다.
그는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신앙은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알 수 없는
뜻마저도 받아들이게 인도하였다.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였다.
또한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비판과 오해를 풀어나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어가는 1971년 2월 20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카푸친회 장상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비오 성인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비오 신부님이 얻은 명성을 보십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가 겸손하게 미사를 지내서 그렇습니다. 새벽부터 잠중까지 고해소에 머물며 고해를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쉽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성 비오 신부의 거룩함과 명성은 살아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더욱 커졌다.
그래서 1969년부터 그에 대한 시복시성이 절차가 시작되었다.
1982년 11월 29일 그는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시복 추진에 대한 '장애 없음'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9년 5월 2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6월 16일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30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예수님의 오상을 받아서 '오상의 비오 신부'로 불리는 그는 또한 '파드레 비오'(Padre Pio)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를 존경하여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으로 '비오 신부님'이란 의미이다.

 
 
 
 
 
 
 
     ▶아담난(9.23)
 
성인명 아담난(Adamnan)
축일 9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저술가
활동지역 이오나(Iona)
활동연도 624-704년
같은이름 에우난

 


   아일랜드 더니골의 드럼홈에서 출생한 성 아담난은 그곳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으며,
679년에는 이오나의 제9대 원장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알드프리드의 부왕 오스비가 사망한 후 노섬브리아의 왕위에 대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알드프리드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686년에 알드프리드가 왕위에 오르자 아담난은
왕을 방문하여 아일랜드 포로들의 석방을 호소하였다.

   2년 후 그는 영국의 수도원을 두루 방문하였으며, 성 체올프리두스로부터 부활절에 관한
로마력 채택을 도입하였다. 아담난은 끊임없이 활동하여 많은 성공을 거두었는데,
수많은 아일랜드계 수도자를 얻었고, 여러 수도원을 세웠으며, 켈트족의 관습을 물리치고
로마 전례를 도입한 것 등이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성공은 여자들은 전쟁에서 제외되어야 하며
또 여자와 어린이들은 포로가 되거나 살해할 수 없다는 소위 비르 회의를 성공시켜
'아담난 법'이라는 협정서를 만든 일이었다.
또한 그는 성 콜룸바의 생애를 기술했는데, 이것은 중세 초에 나온 가장 중요한 전기 중의 하나였다. 또한 그는 “성소에 대하여”(De Locis Sanctis)라는 책도 저술하였다.
아담난은 아일랜드에서 성 에우난으로도 불려진다.
 
 
 
 
 
 
 
     ▶테클라(9.23)
 
성인명 테클라(Thecla)
축일 9월 23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바오로의 제자,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이코니움(Iconium)
활동연도 +100년경
같은이름 데클라, 떼끌라, 테끌라

 

 

  이코니움의 성녀 테클라(Thecla) 

 신약성경의 이코니온인 오늘날의 터키 코니아 성 바오로 성당 제대 벽면에 걸려 있는 성화 

 


   2세기에 기록된 묵시록적 작품과 유사한 형식을 갖고 있는 "바오로와 테클라 행전"에 의하면,
성녀 테클라는 소아시아 지방 이코니움(오늘날 터키의 코니아, Konya)의 저명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사도 바오로의 개인적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성녀는 18세 때에 이코니움에 있는 오네시포루스의 집에서 사도 바오로가 행한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관한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례를 받은 성녀 테클라는 결혼 약속을 파기하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많은
수모를 당하며 살아야 했다. 파혼당한 약혼자가 이코니움 지방 사람들을 선동하여 사도 바오로를
감금하도록 했고, 성녀 테클라는 감옥에 갖힌 사도를 몰래 찾아갔다가 들켜,
바오로는 추방당하였고 그녀는 화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성녀 테클라가 성호를 그은 후
불타는 장작더미에 던져지자 갑자기 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고 한다.

   기적적으로 화형을 면한 그녀는 사도 바오로를 만나 동행을 간청하였고 결국 안티오키아까지
갔다. 안티오키아에 살던 알렉산데르라는 사람이 그녀에게 반했으나, 그녀가 관심을 보이지 않자
결국 무고를 하였다. 그래서 성녀 테클라는 야생 동물들이 있는 곳에 갇히기도 하고,
황소에 묶여 몸이 찢기기도 하고, 심지어 독사 굴에 던져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이 모든 위험에서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듯 수많은 고난을 겪은 후 성녀 테클라는 오늘날 터키의 이셀 지역인 칼리카둠의
셀레우키아 트라케이아에 있는 동굴에서 홀로 생활하면서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기적적으로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지역 의사들의 반발로 총독에게
체포되었는데 그때 성녀의 나이는 90세였다. 성녀 테클라의 죽음과 관련된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바위를 향해 달려가자 바위가 저절로 열리고, 그녀가 바위 안으로 사라지자 바위가 닫혀
무덤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사도 바오로의 제자로서 최초의 여성 순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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