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9월4일(금)聖女로사, 聖마리노, 聖모세님..등

H-Simon 2009. 9. 3. 13:08

 

 
9월4일(금)聖女로사, 聖마리노, 聖모세님..등
                              

                하느님,  

               성인 성녀님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주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저희를,

               아버지의 한 없으신 사랑으로 강복해 주옵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리옵니다....아멘

 

                             ****         ****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해당 번호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복녀 가타리나** Catherine 9월 4일 동정녀 라코니지(Racconigi) 1486-1547년
2 성녀 로사 ** Rose 9월 4일 동정녀,3회원 비테르보(Viterbo) 1234-1252년
3 성녀 로살리아 ** Rosalia 9월 4일 동정녀,은수자   +1160년?
4 루피노 Rufinus 9월 4일 소년,순교자   +연대미상
5 마뇨 Magnus 9월 4일 순교자   +연대미상
6 마르첼로 Marcellus 9월 4일 신부,순교자 리옹(Lyon) +178년
7 마르첼로 Marcellus 9월 4일 주교,순교자 트리어(Trier) +연대미상
8 마리노 ** Marinus 9월 4일 부제,은수자 산 마리노(San Marino) +4세기?
9 막시모 Maximus 9월 4일 순교자   +연대미상
10 모세 ** Moses 9월 4일 구약인물,예언자,율법학자    
11
1세 **
Boniface I 9월 4일 교황   +422년
12 비탈리코 Vitalicus 9월 4일 소년,순교자   +연대미상
13 실바노 Silvanus 9월 4일 소년,순교자   +연대미상
14 암미아노 Ammianus 9월 4일 순교자   +310년
15 오체아노 Oceanus 9월 4일 순교자   +310년
16 울탄 Ultan 9월 4일 주교 아르드브라칸(Ardbraccan) +657년
17 복자 윌리엄 브라운 William Browne 9월 4일 순교자 노샘프턴셔(Northamptonshire) +1605년
18 율리아노 Julian 9월 4일 순교자   +310년
19 성녀 이다 ** Ida 9월 4일 과부 헤르츠펠트(Herzfeld) +825년
20 젠틸리스 Gentilis 9월 4일 순교자 마텔리카(Matelica) +1340년
21 카스토 Castus 9월 4일 순교자   +연대미상
22 성녀 칸디다 Candida 9월 4일 베드로의 제자,동정 순교자 로마(Roma) +78년
23 타멜 Thamel 9월 4일 순교자   +125년
24 테오도로 Theodore 9월 4일 순교자   +310년
총 24 성

 

 

   ▶가타리나(9.4)
 
성인명 가타리나(Catherine)
축일 9월 4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동정녀
활동지역 라코니지(Racconigi)
활동연도 1486-1547년
같은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라코니지는 1486년에 어느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났고, 카타리나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가 낡아빠진 광에서 태어난 것은 묘하게도 그녀의 일생이 물질적으로 궁핍하며
건강치 못하고 또 이해받지 못한 사람으로 살 것임을 상징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어느 누구보다도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그녀는 이미 5살 때부터 아기 예수와 성모께 대한 남다른 신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집안에서 힘든 일을 하거나 굶주림으로 눈물을 흘릴 때마다 그녀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서
큰 위로를 받곤 하였다.

   1500년의 성 스테파누스 축일에 그녀는 이 성인에게 기도하였는데, 참으로 기적적으로
성 스테파누스가 발현하여 성령께서 특별히 보살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때 세 줄기의 빛이 그녀를 비추며, “나는 네 안에 내 거처를 정하고,
너의 영혼을 깨끗하고 밝게 할 것이며, 생기를 주리라”고 했다.
그 후 카타리나는 신비적인 신랑과의 동정 서원을 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손가락에는 신비스런 반지가 끼워 있었고,
이때부터 그녀는 가시관과 주님의 오상의 아픔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다. 그 후 카타리나에게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또 영적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을 짓누르는 악마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등 오랜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녀는 62세 때 카르마뇰라에서 운명하였다.

 

 

    ▶로사(9.4)
 
성인명 로사(Rose)
축일 9월 4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녀, 3회원
활동지역 비테르보(Viterbo)
활동연도 1234-1252년
같은이름 로싸, 로즈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Rosa)


   이탈리아의 비테르보에서 태어난 성녀 로사는 병을 앓던 8세 때에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복을 입으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후에도 집에서 그냥 지내면서 평범한 여성으로 자랐다.
병에서 회복된 그녀는 평신도의 회개 복장을 하였고, 우리 주님의 고난을 더욱 절실히
체험하게 되었으며, 죄인들의 무례함과 배은망덕을 대신 속죄하였다. 그 후 12세경부터
그녀는 타오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길 수 없어 거리로 뛰쳐나가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그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수한 경고를 하였다. 그로 인해 그녀는 집에 감금되었고,
만일 다시 정치 지도자들을 비방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를 받았다. 결국 성녀 로사와 그녀의
부모는 추방되어 소리아노로 갔는데, 여기서 그녀는 그 당시의 독재자인 프레데릭 황제의
죽음을 예고하였고, 그것은 꼭 13개월 후에 일어났다. 이때부터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비테르보에 있던 로사의 성 마리아 수녀원 입회를 청했지만 거절당하였다.
그래서 그녀의 본당사제가 성당 곁에 수녀원을 만들고 몇몇 동료들과 함께 살도록 주선하였으나
집으로 돌아와서 곧 운명하였다.

 
 
 
 
 
 ▶로살리아(9.4)
 
성인명 로살리아(Rosalia)
축일 9월 4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녀, 은수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160년?
같은이름 로사리아, 로쌀리아

 


   오래전부터 시칠리아에서는 성녀 로살리아에 대한 공경이 보편화되었으나 옛 순교록에는
그녀의생애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녀 자신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비문은 그녀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40일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는데, 그곳에는 "퀴스퀴나의 영주인 시니발디 백작과
로사의 딸인 나로살리아는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이 동굴에서 살기로 결심하였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비문과 전설에 따르면, 성녀 로살리아는 퀴스퀴나의 영주인 시니발디 백작과 로사의 딸로
시칠리아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그녀는 바실리오회의 수녀였다가 그 뒤에 몬테 코스키나와
팔레르모 근처에 위치한 몬테 펠레그리노의 동굴에서 은수자로 살다가 운명하였다.
..                                           .

   1624년 전염병이 돌았을 때, 그녀의 시신이 발견되어 장엄한 행렬을 따라서 팔레르모로 옮겨졌고,
그 후로 팔레르모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1630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그녀의 이름을 로마의 순교록에 포함시켰다.
그녀의 시신을 발견한 날인 7월 15일을 축일로 기념하기도 하지만, 현재 축일인 9월 4일은
그녀가 죽은 날로 추정한 날이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에 널리 퍼졌으며,
이탈리아인들의 이민으로 해외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녀가 살았던 동굴들에 소성당이
세워졌고, 그녀의 유해는 팔레르모의 주교좌 성당의 아름다운 소성당에 모셔져 있다.
팔레르모에 페스트가 퍼졌을 때나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성녀에게 기도해서 큰 피해를
모면한 팔레르모의 주민들은 성녀 로살리아를 특별히 페스트와 지진에서 구해 주는
성녀로 공경하고 있다
 
 
 
 
 
     ▶마리노(9.4)
 
성인명 마리노(Marinus)
축일 9월 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부제, 은수자
활동지역 산 마리노(San Marino)
활동연도 +4세기?
같은이름 마리누스

 

산 마리노의 성 마리노(Marinus)


   성 마리누스(또는 마리노)는 달마티아 해안의 사람으로 채석공이었다. 그는 리미니의 성채를
재건한다는 소문을 듣고 다른 석수 레오와 함께 그곳에 가서 몬테 티타노의 채석장에서 일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중노동을 하고 있던 일단의 신자들이 섞여 있었다.
성 마리누스와 레오는 그들을 위로 격려하면서 또 다른 개종자들을 얻고 있었다.

   그 후 레오는 리미니의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어 몬테펠트로 갔고, 성 마리누스는 부제가
되었으나 이전의 석공 일을 계속하였다. 12년 동안 그는 수로공사 일을 하면서 뛰어난 기술자일
뿐만 아니라 신자 노동자의 모델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는데,
한 달마티아 여인이 그를 자기 남편이라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부인하지 않고 가만히 물러나서 몬테 티타노로 가서 숨어 살았다.
그 후 그는 계속하여 은수자 생활을 하며 여생을 지냈는데, 그가 살았던 곳을 중심으로 하여
오늘날의 산 마리노 도시가 탄생하였다.
 
 
 
 
 
   ▶모세(9.4)
 
성인명 모세(Moses)
축일 9월 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구약인물, 예언자, 율법학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모이세스

 


   성 모세(Moyses)는 출애급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요 예언자이자 율법의 중개자였다.
그의 절대적인 권위는 구약과 신약성서 시대는 물론 오늘날가지 이스라엘의 율법이
‘모세법’이라고불리는 전통이 철저히 지켜지는 데서도 드러난다.
구약성서의 모든 신학이 흘러나오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 ‘출애급 사건’과 ‘시나이 산 계약’이라고
한다면, 야훼 하느님이 모세를 선택하여 이 해방 사건과 계약의 중개자로 삼은 것은
바로 이스라엘 안에서 모세가 가지는 절대적인 권위의 근거가 된다.
출생에서부터 특별한 일화를 남기고 있는 모세는, 비록 모세오경 외의 구약성서에서 그 이름이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율법 중심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계약과 율법의 중개자로서의
그 독보적인 권위는 확고하다.

   출애굽기 1장에 의하면 모세는 불어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위협을 느낀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이 낳은 자식 가운데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도록 명령한 시대에 태어났다.
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의 누이는 미리암이었으며
형제로는 아론이 있었다(출애 2,1; 6.16-20; 7,7; 민수 26,59; 1역대 23,12-14).
모세의 부모는 파라오의 눈을 피해 석 달 동안 기르다가 더 이상 숨기가 어려워지자 왕골 상자에
아기를 넣고 강물에 띄웠다. 파라오의 딸인 공주가 그 상자를 발견하고 아이를 안아 들자,
이를 지켜보던 아기의 누이(미리암)는 아기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하여 아기는 다시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다가 파라오의 딸에게로 보내졌다.

   모세는 공주의 양자로서 이집트 궁중 안에서 성장하였다. 청년이 된 모세는 어느 날 이집트인이
한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쳐 죽여 몰래 모래 속에 묻어 버리지만,
이 일이 탄로난 것을 알고는 광야로 도망을 갔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시뽀라라는 여인과
결혼하고 장인 르우엘(혹은 이드로라고도 함, 출애 2,18; 3,1; 4,18; 18,1)의 집안에서 양 떼를 치는
목자 생활을 하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불꽃이 이는 가운데에도 타지 않는 떨기 가운데 신비로이 나타나신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극심한 노역에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또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신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모세에게 이집트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당신이 약속하신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갈 것을 명하셨다(출애 3,1-12).

   야훼 하느님의 사명을 받고 파견된 모세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 야훼를 섬길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을 전하지만, 파라오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역을 더욱 심하게 부과하여 모세는 같은 민족들로부터 원성을 듣게 되었다.
모세는 파라오의 고집을 꺾기 위해 야훼의 말씀에 따라 이집트 땅에 열 가지 재앙을 선포하였다.
결국 열 번째 재앙에 파라는 굴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 주었다. 모세는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해 나오지만 곧 이집트 군대의 추격을 받았다.
이 때 갈대 바다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서 바다를 건너고, 뒤쫓던 이집트 군대는 갈라진
바다 한가운데에서 다시 합쳐지는 물에 휩쓸려 몰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급을 한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시나이 광야에 이르게
되었다(출애 19,1). 야훼 하느님은 모세를 산 위로 부르시고 그를 중개자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계약을 맺으셨는데, 여기에서 모세의 특별한 위치가 분명히 드러났다.
모세는 산을 오르내리며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해 주었다. 모세가 백성 앞에 내놓은
하느님의 말씀은 곧 계약의 말씀으로서 주된 내용은 십계명이었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 모든 말씀과 법규들을 백성에게 전하자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환호하며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 살 것을 서약하고, 모세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의 제사를 드렸다(출애 24장). 이로써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출애급의 해방 사건을 맞은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보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여행을 시작할 때, 광야에서 제일 먼저 부딪힌
문제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세에게 굶겨 죽이려고 이집트 땅에서
데려 내왔느냐는 식으로 대들고, 모세는 백성의 불평을 야훼께 아뢰어 만나와 메추라기와
물을 얻었다(출애 15,22-17,7).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생활을 하면서 단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수동적인 위치에만 있지 않고, 하느님의 법이 곧 삶의 길임을 백성에게 가르치고,
혹 그들이 하느님의 길을 벗어날 때에는 맹렬히 비난을 하면서도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분노를
풀어드리기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드렸다.

   이렇게 모세는 야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면서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로이 탄생하게 하는 중개자가 되었고, 40년의 광야생활에서 한편으로는
하느님 백성의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지도자로서 백성에게 하느님의 길을 가르치고
그들의 모함과 질시를 받으면서도 그들의 죄를 일깨우고 하느님께 중재의 기도를 드려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 광야의 여정에서 만나는 이민족과의 전투에서는 군사 지도자로서 백성을
지휘하여 앞길을 터가야 했다.

   40년 광야의 여정이 끝나고 예리고 맞은편 느보 산의 비스가 봉우리 위에서 야훼는 모세에게
요르단 강 건너편에 자리한 약속의 땅을 보여주셨다. 이때 모세의 나이는 120세였다.
그러나 모세는 그 강을 건너지 못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때 출애급을 몸으로 경험한
세대는 이미 광야에서 다 죽고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으니,
모세를 포함한출애급 세대에게 허락된 몫은 자신들이 아닌 그 후손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의 풍요함을 누리도록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모세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신명 34장), 그로 인해 그의 무덤은 전례적인
장소가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모세는 고별사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가르치고(신명 32장),
축복 예언(신명 33장)을 하는 부분은 모세에 관한 성서 내용 중 아름다운 에필로그를 이루고 있다.
모세오경을 끝맺는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모세에 대한 찬사는 모세의 업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파시오 1세(9.4)
 
성인명 보니파시오 1세(Boniface I)
축일 9월 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교황
활동지역  
활동연도 +422년
같은이름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이탈리아 로마의 사제였던 성 보니파티우스는 418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출에는 큰 소란이 따랐다. 일단의 반대파들이 라테라노(Laterano)를 점거하고,
에우랄리우스를 교황으로 선출한 바로 그 다음 날 그가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황제 호노리우스는 두 번의 회의를 소집하여 보니파티우스의 적법성을 가려내고,
에루랄리우스와 그의 일파를 제거하였다.
보니파티우스는 펠라기우스파에 반대하던 선임자들의 정책을 계속하였고, 황제 테오도시우스를
설득하여 일리리쿰을 서방교회 관할권으로 되돌아오게 하였으며,
펠라기우스파를 반박하는 수편의 글을 썼던 아우구스티누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함으로써
혼란스럽던 교회를 끝까지 잘 지켰다.
 
 
 
 
 
 
     ▶이다(9.4)
 
성인명 이다(Ida)
축일 9월 4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과부
활동지역 헤르츠펠트(Herzfeld)
활동연도 +825년
같은이름  

 


   귀부인이었던 성녀 이다는 카를마르텔의 손녀딸로서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샤를대제의 고관이었으므로 궁중에서 성장하여 에그베르투스란 사람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청상과부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극도의 기도와 고행에 몰두하는 한편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데 전념하였다.
또 그의 아들은 어머니의 고결한 모습을 보고 자신도 수도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관을 미리
만들어 두고 그 속에는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음식들을 보관하였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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