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정권과 대립하지 않겠구나" 안도 한숨
1992년 12월말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가 당선 인사차 찾아왔다.
"당선을 축하합니다. 좀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저는 다른 후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다를 바 없습니다."
문민통치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 정말 기뻤다. 선거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아~ 이젠 목소리 높 혀 민주화를 촉구하지 않아도 되고,정권과 팽팽하게
대립할 필요도 없겠구나'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70년~80년대에 시국관련 발언을 자주 해서인지 어떤 사람은 내가 정치를
좋아하는 줄로 안다. 그러나 그 시기에 입버릇처럼 중얼거린 말이 "성직자
가 언제까지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라는 것이었다.
모처럼 마음이 홀가분했다. 근심이 깊을 때는 TV도 눈에 안 들어오더니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여느 남자들처럼 스포츠 중계방송을 좋아한다. 우리 나라 축구팀 승
리에 감격한 나머지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따라 부른 적이
있다.
외국에서 열린 축구대회로 기억한다. 꽤 늦은 밤에 라디오에서 경기를 중
계 방송 해 주었는데 우리 나라 대표팀이 막판에 극적으로 승리했다.경기
가 끝났는데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마침 방송종료 애국가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동해 물과 백두산
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벽에 걸린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하고 애국
가를 따라 불렀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남들 다 자는 그 깊은 밤에 혼자
서 무슨 짓(?)이란 말인가. 누가 내 모습을 봤다면 실성한 줄 알고 기겁을
했을 게다.
그런데 내게 스포츠경기 징크스가 있는 것 같다.국민적 관심이 쏠린 경기
라서 만사를 제쳐 두고 TV 앞에 앉아 응원하면 번번이 패한다.그래서 꼭
이겨야 될 경기일 것 같으면 도중에 TV를 끄기도 했다. 내가 안 보고 있
으면 지다가도 이기는 경기가 여러 번 있었다. 참 희한한 일이다.
영화도 좋아하는 편이다.주교가 된 뒤부터는 TV '주말의 명화'를 주로 보
는 편이었지만 신부시절에는 극장엘 자주 갔다.난 이상하게 슬플 때는 눈
물이 안 나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 눈물이 난다.
'주말의 명화'를 보면서도 몇 번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특히 성녀 베르나데타(1844~1879)를 다룬 영화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프랑스 루르드 태생인 베르나데타는 성모님 발현을 9번이나 목격한 뒤 수
녀가 된 분이다. 루르드 성모님이 그에게 "너는 나를 만났기 때문에 현세
에서 많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네가 바라는 행복은 하늘에서 누릴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신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 때 무척 지쳐 있었던 것 같다.주님이 주시는 은혜 때문에 현세에서 고
통을 겪는다는 말씀이 무뚝뚝한 나를 울렸다.
'쉰들러 리스트' '포레스트 검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같은 영화도 봤다.
한결같이 감명깊은 영화였는데 운 좋게도 시사회에 초대받아 공짜로 봤다.
공짜 영화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사람들이 내게 취미를 물어올 때마다 곤혹스럽다. 특별한 취미가 없다.
재주나 잡기(雜技)가 어지간히 없는 사람이다.
짬이 날 때마다 테니스를 하기는 했다. 조금이나마 할 줄 아는 스포츠가
테니스다. 그런데 그나마도 87년 상계동과 양평 동 철거민들이 교구 청
테니스장 옆 빈터(현 교구청 별관뒤)로 집단 이주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은 그 곳에 대형 천막을 치고 반 년 가까이 생
존권 투쟁을 벌였다.
테니스를 아무리 좋아하기로서니 어떻게 그들 옆에서 테니스를 즐길 수
있겠는가.철거민들이 새 보금자리를 구해 떠났지만 운동을 다시 하려니까
힘이 들어서 단념했다.
등산에는 제법 재미를 붙였다. 지금은 관절염 때문에 힘들지만 은퇴 전까
지 북한산에 자주 올라갔다. 서울 도심에 그런 아름다운 산이 있는 건 축
복이다.설악산 대청봉도 두 번 다녀왔는데 한번은 비선대까지 내려오는데
10시간이나 걸렸다. 서울 근교 산에 다니면서 훈련을 한다고 했는데도 무
척 힘들었다.
요즘 스포츠 레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나라면 등산을 권하
고 싶다. 산은 사람 마음을 정화시켜준다.사람(人)이 산(山)에 오르면 신선
(仙)이 되고, 계곡(谷) 아래로 내려오면 속(俗)이 된다고 한다.
산에 가면 가끔 재미난 헤프닝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등산복 차림에 모자
를 눌러 쓴 나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지나간다. '어디서 많이 본 사
람인데….'라는 표정이다. 어떤 사람은 "김수환 추기경을 많이 닮았네요"라
며 말을 건다. 그럴 때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저도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
다"라며 시치미를 뚝 뗀다. 대부분 알아 보기는 하지만 정말 닮은 사람인
줄 알고 그냥 돌아서는 등산객도 있다.
나를 진짜 잘 알아보는 사람은 어느 할머니였다. 그 할머니는 어디 서건
내가 눈에 띄기만 하면 달려와서 껴안았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다. 알아
보니까 신부가 되지 못한 내 소신학교 친구의 모친이었다. 아들이 신부가
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는지 신부들, 특히 나를 보면 무작정 껴안는 것
이었다.그걸 안 뒤부터 할머니가 안기면 나도 살포시 안아 주었다. 그러면
금방 물러났다.
그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나를 몇 십 년 동안 따라다닌 할머니가 한 분
있었다. 흔히 말하는 '스토커'인데 교구 청 신부들은 물론 주교관에 몇 번
출입해 본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마리아 할머니다.
이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하루종일 교구청 1층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
가 어딜 가려고 하면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서고, 어딜 갔다가 들어오면
같이 들어가겠다고 조르는 통에 어지간히 애를 먹었다. 마리아 할머니는
정신이상자였는데 겉보기에는 너무나 멀쩡했다. 할머니가 나오지 않은 날
이면 주위 사람들이 "오늘은 애인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놀려댔을 정도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내 전임자 윤공희 대주교님과 노기남 대주교님도 똑
같이 따라다녔다.내가 교구 장 직에 취임해서 눈길도 안주니까 할머니가
"얼굴도 못생긴 게 아는 척도 안 한다"고 불평한다고 누군가 내게 전해
주었다.
속으로 '못생겼다고? 옳거니, 잘 됐다'고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자꾸 보니
까 잘 생겼는지 주교관에 출근하다 시피했다.
<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