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정은 형님만한 분 없어"
1983년 9월 말 세계 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에 도착했다.
그 곳에 체류 중인 장익신부(현 춘천교구장)가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기에
저녁식사를 하러 바티칸 근처 중국집에 들어갔다.
식사를 막 마쳤을 때였다.장신부는 평소보다 나를 더 어려워하는 자세로
머뭇거리더니 "저.........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며 말문을 무겁게
열었다.
"무슨 얘긴데?"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 오늘 서울에서 형님 신부님이 돌아가셨다
는 기별이 왔습니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푹 파이는 것 같았다.머리와 가슴이 텅 비어 아
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먼 길을 왔는데 식사라도 제대로 하라고 장신부
가 배려해 준 모양이었다. 부음(訃音)을 공항에서 들었더라면 육신마저 허
기져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형님 김 동한(가롤로) 신부님.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 가장 큰 빈자리를
남겨 두고 가신 분이다.나와 어머니 사이의 천륜지정(天倫之情)에 비할 바
는 아니지만 뭐라 그럴까, 한 인간으로서 피부로 느끼는 정은 형님만한 사
람이 없었다.
형님은 참으로 정이 깊은 분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식들 먹여 살리
느라 행상을 나가시면 나는 빈 집에서 세살 터울인 형님하고 늘 같이 지냈
다.형님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먼저 소신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떨어
져 본 적이 없다. 사내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하는데 형과 싸운 기억
도 없다.
그리고 15살 때까지 형님한테 "야, 너"하는 식으로 반말을 했는데도 워낙
유순한 성격이라 그 점에 대해 별 말이 없었다. 형님이라기보다 단짝동무
였다.
형님의 소신학교 첫 방학 때였을 게다. 오랜 만에 집에 온 형님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예전같이 형님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방학 내내
뛰어 놀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오니까 형님이 집에 없었다.
형님도 개학에 맞춰 소신학교로 돌아간 것이었다. 마음이 휑하니 뚫린 것
같은 공허함을 그 때 처음 느껴 보았다.
부음을 들었을 때도 어린 시절에 느꼈던 공허함이 엄습했다.회의 때문에
로마에 한 달 머물면서 낮이건 밤이건 형님 생각을 한시도 떨치질 못했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회의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형님과 친했던
분들에게 부음을 전할 겸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형님에 대한 정을 글로
옮길 때면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런 식으로라도 애달픈 마음을 달래야
했다.
출국 전 병원에서 뵌 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형님은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돼 다리 절단수술을 받아야 했다. 몸이 성치 않은데도 당신 몸은 돌볼
생각을 않고 결핵환자들을 위해 뛰어다니시느라 병이 그 지경까지 악화된
것이다.
형님은 당뇨 합병증으로 결핵에 걸려 마산 국립요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
안 결핵환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그 쪽 방면으로 뛰어들었다. 천성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특히 가난하고 헐
벗은 사람을 돕는 일에는 앞뒤를 가리지 않으셨다.
형님이 1976년 운영난에 허덕이는 대구 결핵요양원을 인수할 때만 해도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교회 관심은 매우 미약했다. 그런 여건에서 빚에 쓰
러져 가는 시설을 맡아 운영했으니 고생이 오죽했겠는가.
언젠가 요양원에서 들렀는데 형님이 요양원 확장 계획을 말씀하셨다. 내가
"건강도 안 좋은데 무모하게 일을 벌이는 것 아닙니까? 수용 환자들 숫자
를 줄이세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형님은 "오갈 데는 고사하고 그냥 두면
죽을 게 뻔한 중환자들이 도와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외면하겠느냐"며 내
조언을 일축하셨다.
형님 약점은 바로 이 착한 마음에 있다. 남의 사정 다 들어주고, 때로는
사람을 너무 믿어서 속기도 하셨다. 이런 선한 어리석음 때문에 교회 어른
들과 주변 친지한테서 진짜 어리석은 사람으로 오해를 받아 소외당하는 시
련을 겪기도 하셨다. 그럴 때마다 형님은 묵주를 돌리면서 성모님께 의탁
하셨다.
형님은 당뇨병을 다스리지 못해 시력이 점점 약해지고 두 다리가 마비되어
갔다. 그런 몸으로 사방팔방 후원자들을 찾아다녔으니 그 걸음이 얼마나
무겁고 고달팠을까. 그런데도 그런 심경을 한번도 내비치질 않으셨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련해진다.
내가 주교가 된 후부터는 형님과 접촉도 뜸했다. 어떤 해에는 한두 번 스
쳐 지나가는 정도였다. 주교관 출입이 행여나 이 동생에게 누가 될까 봐
일부러 피하신 것이다.
형님은 나와 얼굴이 무척 닮았다.사람들이 거리에서 "아이고, 추기경님!"
하며 반갑게 인사를 하면 주위 시선이 모두 쏠리는 터라 여러 번 당황한
적이 있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하지만 공부는 형님이 훨씬 잘하고 마음도 착했다. 형님은 학교성적이 늘
'갑(甲)'이었는데 난 '을(乙)'에서 맴돌았다. 어린 마음에 그런 형님이 자랑
스러웠다.
내가 학병에 끌려갈 때 형님은 전장으로 나가는 이 동생의 손을 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전쟁이 끝나 귀국 선을 타고 돌아왔을 때도 그
러셨다. 여러 날 굶은 채 부산항에 내려 밥 한 그릇 얻어먹으려고 찾아간
범일동성당에서 기적적으로 형님을 만났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지 못한
다. 형님은 그 때 범일동성당 보좌신부였다.
로마에서 돌아오자마자 형님을 모신 대구 남산동 성직자 묘역으로 내려갔
다. 소박한 분묘 앞에 작은 나무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그 때서야 형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요양원에 들러 형님이 쓰시던 방에 가
보았다.방은 내 마음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 날 밤 형님의 체취가 남아있
는 그 방에서 잠을 잤다.
참으로 고마운 것은 지금도 많은 분들, 특히 당시 형님 복지사업을 후원해
주었던 '밀 알회' 형제자매들이 기일(9월28일)이 돌아오면 한데 모여 형님
을 추모하는 것이다. 나도 매년 기일에 내려가 미사를 함께 봉헌하는데 그
토록 많은 이들이 20년을 한결같이 한 사제를 기억해주는 게 놀랍고 고마
울 따름이다.
형님은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요한 15, 13)는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다 가신 분이라고 믿는다. <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