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기경님의 진솔한 삶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42『 오원춘 사건 』

H-Simon 2009. 4. 7. 06:54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42
『 오원춘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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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춘 사건은 유신정권의 파렴치한 농민운동 탄압


'차라리 내가 감옥에 가는 게 낫겠다.'

1970년대 후반 정부와 교회가 충돌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아 무척 고달 펐다.

신부 연행과 시국기도회가 악순환처럼 반복되고, 추기경 직분상 그 한 가운데 서다 보니 차라리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 속이 편할 것 같은 생 각이 들 때가 많았다.교회와 정부는 언제 파열될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 관계였다.

1979년 여름에는 오 원춘 사건이 교회 안팎을 뜨겁게 달구었다. 사건 전말은 이렇다.

경북 영양에서 농사를 짓는 신자 오 원춘 씨는 군(郡)에서 알선한 불량 씨앗감자 때문에 피해를 입었는데 용감하게도(?) 당국을 상대로 피해보 상을 받아 냈다. 그 때만 해도 농사꾼이 당국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려면 여간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가톨릭 농민회 안동지역 임원이었던 그는 강연회에서 피해보상을 받아 낸 성공사례를 몇 차례 소개했다.

이로 인해 농민들 사이에서 피해보상운동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경찰 은 그를 요주의 인물로 지목했다. 그런데 한창 바쁜 5월 농사철에 그가 갑자기 행방 불명되었다. 보름 만에 나타난 그는 영양본당 신부를 찾아 가 자신은 정보기관원들에게 납치돼 포항, 울릉도 등지로 끌려 다니면 서 폭행을 당했다고 말했다.

분개한 안동교구 신부들은 즉각 진상조사에 착수해 납치사실을 확인 하고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란 제목의 유인물을 제작, 배포했다. 정부 당국은 교구청에서 근무하는 정호경 신부를 구속하는 등 가톨릭 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경찰 당국은 "오원춘은 다방 아가씨 모양과 개인적으로 여행했다"고 주장하면서 허위사실 유포 죄로 몰아붙였다.

정부 당국은 여론공작을 통해 가톨릭이 근거없는 사실을 왜곡, 날조해 사회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고 매도했다. 심지어 대구지검과 대구교도소 측은 증인들까지 동원해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하면서 여론재판을 했다. 직접 듣지는 못했으나 어디선가 '가톨릭은 빨갱이'라는 말도 나왔 다고 한다.

유신정권의 파렴치한 농민운동 탄압인가, 아니면 가톨릭의 허위사실 유포인가?

사활을 건 싸움은 한치 양보 없이 여름 내내 이어졌다. 전국 교구에서 시국기도회와 항의시위가 잇따라 열렸다. 형집행정지로 출감한 문정현, 함세웅 신부는 다시 구속됐다.

나는 안동교구 쪽 주장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신부들 얘기라고 해서 무조건 믿은 것은 아니다. 여러 정황을 놓고 볼 때 가톨릭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하려는 유신정권 의도를 감지할 수 있었다.

더욱이 프랑스인인 안동교구 장 두봉(파리외방전교회) 주교님은 논리적 판단력이 매우 뛰어난 분이다. 사실을 과장하거나 분위기에 휩쓸리는 분이 아니다. 나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두봉 주교님께 재차 물어 보았 으나 그분은 유신정권의 탄압이라도 확신하고 계셨다.

안동본당(현 목성동본당)에서 열린 시국기도회에 참석해서 정부의 농민 운동 탄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언덕에 있는 안동성당에서 스피커 볼륨 을 최대한 올리면 소리가 멀리 퍼지는데 그날 안동시민들이 다 들을 정 도로 내 강론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1951년 사제 품을 받고 첫 부임한 사목지가 안동본당이다. 그 때도 성탄절이 다가오면 스피커 볼륨을 올려 놓고 시민들에게 성탄노래를 들려주곤 했다. 그 날 시국기도회 후 사제단과 농민 80여명이 성당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언론은 이를 죽창으로 무장한 폭도들 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여론을 호도하기에 바빴다.

사태가 불리하게 전개됐다. 당사자 오 원춘 씨는 변호사들에게 자신이 납치됐다고 얘기하면서도 법정 검찰 심문에서는 말끝을 흐리거나 다른 얘기를 했다. 변론을 맡았던 고 황인철(세바스티아노) 변호사는 오씨가 법정에서 자꾸 딴소리를 하는 것이 너무 속상해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대취(大醉)해 울기까지 했다.

정부는 이 기회에 천주교 민주화운동에 철퇴를 가하겠다는 의도로 안동 교구 장 두봉 주교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외무부장관을 교황청에 파견해 외국 선교사의 정치간섭을 문제 삼아 추방의사를 전달했다. 마침 두봉 주교님은 교황청에 안동교구 장 직 사임 서를 제출해놓고 재가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두봉 주교님은 교구장직 취임(1969년) 전부터 "외국 선교사이기 때문에 교구 자립기반을 닦고 10년 후 물러 나겠다"는 말씀을 공공연히 하셨다.

교황청은 사임서 수락 여부를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사임 수락은 자칫 한국 정부의 추방 압력에 굴복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봉 주교님도 그 점을 염려하고 계셨다. 교황님은 의견을 좀 더 폭넓 게 듣고자 나와 윤공희 대주교님(당시 주교회의 의장)을 로마로 부르 셨다.

"지금 사임서를 수리하시면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의 두봉 주교 추방에 협력하는 셈이 됩니다. 사임서를 반려해 주십시오."

결국 두봉 주교님은 교구 장 직을 더 수행하신 후 1990년 교구민의 박 수를 받으면서 명예롭게 물러나셨다. 바티칸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정 의와 인권을 지키려는 한국교회의 외로운 투쟁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러한 상황을 정식으로 보고한 적은 없다. 주한 교황대사 루치아 노 안젤로니 대주교님께서 그때그때 보고해 준 것으로 알고 있다. 오 원춘 씨와 사건 관련자들은 법정에서 징역형을 받았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던가. 로마에 다녀오자마자 대 형사건이 또 터졌다. 전주교구 장 김 재덕 주교님께서 강한 어조로 유신 정권을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수감 위기에 처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우선 김 주교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왔다. 전주교구 신부들도 거의 다 따라 올라와 명동성당에 집결했다.

나는 그때 위기감을 느꼈다. 김 주교 구속사태가 벌어지면 정부와 교회 의 정면대결은 불을 보듯 뻔했다. 마주 달리는 두 열차가 충돌하기 직전 상황 같았다. 나도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정부측 결정을 기다렸다. 정면 충돌을 피하려면 교회 건 정부 건 어느 한쪽은 물러서야 했다. 하느님께서 정말 도와주셨다.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한 발짝 물러섰다.

몇 달 후 박 대통령이 피살되고 유신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고문과 협박 속에서도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친 이들의 용기 와 눈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바람의 기별


라디오의 다이얼을 조정하는 딸아이한테 문득 아버지가 물었다.

"잡음 없는 음악을 들으려면 듣고자 하는 방송국의 주파수에 정확히 맞추어야겠지?"

"그럼요, 아버지."

"그럼 네 마음의 소리를 네가 들으려면 어떤 주파수에 맞춰야겠다고 생각하니?"

대답하지 못하는 딸아이한테 아버지가 말했다.

"숨쉬는 것이 때로는 천둥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진솔해야 한다. 진솔의 주파에 맞추면 너의 영상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번에는 딸아이가 물었다.

"그러면 아버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면 어떤 주파수에 맞춰야 하지요?"

"그거야 동정의 주파지."

아버지가 설명했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사정을 말하면 자기 경험 또한 끼어 들려고 안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이 이야기할 때는 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딸아이가 다시 물었다.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어떤 주파수에 맞춰야 하지요?"

"그거야 겸손이지. 스스로 낮아지고 비워지지 않고서는 그 주파수는 맞춰지지 않는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파수가 열리면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바라는 것만을 잔뜩 늘어놓고 선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은 들을 생각도 않고 일방적으로 수화기를 딱 내려놓지."

아버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한테 모든 주파수를 다 열어 놓고 나무 아나운서를 통해 날씨 아나운서를 통해 풀잎 아나운서를 통해 당신의 말씀을 열심히 전하고 있다."

딸 아이는 먼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 정채봉님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