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기경님의 진솔한 삶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9『 전쟁터에서 만난 귀한인연 』

H-Simon 2009. 3. 27. 19:29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9

        『 전쟁터에서 만난 귀한인연 』





<사진설명>
학병시절 전석재 신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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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점령한 부도(父島)에서 재미난 사건도 있었다.

하루는 폭격으로 파인 땅을 고르는 노역을 마치고 막사로 돌아가는데 목사 친구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니 “저 미군한테 말을 걸어 보자”고 했다.재울 옆 언덕바지에 몸을 반쯤 기대고 누워서 작업하는 우리를 감시하던 헌병이었다. 미군하고 손짓 발짓 섞어 가며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영 자신이 없었다.

목사 친구는 “신학교에서 미국 선교사들을 자주 만났기 때문에 웬만큼 통할 것이다”며 그 헌병에게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What's your religion?”(네 종교가 뭐야?)” “I'm catholic(가톨릭이다)” '가톨릭'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앞으로 뛰어나가 “Me too, Me too(나도 가톨릭이다)하며 반가워했다.”

그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You jab (너는 일본 사람이잖아)”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그들을 '왜놈'이라고 부르는 것과 어감이 비슷하다.그의 말은 너는 일본 사람인데 어떻게 가톨릭을 알고 있느냐는 뜻이었다.

그 때부터 또 땅바닥에 일본과 한국 지도를 그려 놓고 “난 이쪽에서 살던 한국 사람인데 학병으로 끌려 왔다. 일본사람이 절대 아니다. 난 한국 가톨릭 신학생이다.” 고 설명했다.

“Can you serve mass?(너 미사 복사를 설 줄 알아?” 형편없는 영어 실력으로 그 질문을 용하게 알아들었으니 참으로 신통 방통한 일이다.

“물론 할 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증거를 대 보라는 듯이“어떻게 하는 건지 한 번 해 보라”고 주문했다.

“인 노미네 빠뜨리스 엣 필리이 엇 스피리뚜스 상띠 아멘.(In nomine patris et Spiritus Sancti.Amen.) 그에게 라틴말로 십자성호부터 그어 보였다. 그 때는 제2차 바티칸 공의 회 이전이라 전 세계 모든 교회가 라틴어 미사경문을 사용하던 시절이다.

이어 층하경(층下徑)을 바쳤다. 층하경은 미사 시작에 앞서 주례사제와 복사가 제단 아래서 주고받으며 바치는 기도였는데 복사를 하려면 제법 긴 층하경을 모두 외우고 있어야 했다.

“인 뜨로이보 앗 알따레 데이. (나 이제 천주의 제단 앞으로 나아 가리로다)” “앗 데움 귀 레띠피깟 유벳뚜뎀 메암.(나의 청춘을 즐겁게 하여 주시는 천주께 나아 가리로다.)” 그 헌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내친 김에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고죄경(고백기도)을 바치기 시작했다. “메아 꿀빠(Mea Culpa. 제 탓이오)...” 그 순간 헌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나랑 똑같이 가슴을 치며“메아 꿀빠. 메아 꿀빠. 메아 막시마 꿀빠(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큰 탓이 옵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러더니 나를 와락 껴안고는 “너는 틀림없는 가톨릭이다”며 기뻐했다.우리 주위로 빙 둘러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일본군들은 '두 사람이 지금 뭐 이상 한 짓을 하는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병이 반가운 마음에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나도 복사를 했다. 한때 신부가 되려고 했다. 내 누이는 수녀다” 라는 말을 대충 이해했다.

가톨릭신자는 기차나 버스 안에서 옆 사람이 묵주반지를 끼고 있는 것만 봐도 특별한 동질감을 느낀다. “아,교우 시군요”라는 인사 한마디면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봄볕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게 신자들 정서다.

그런 정서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선발하신 사도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법통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종교를 믿는다는 동질감이 아닐까 싶다.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와 종파가 있지만 가톨릭은 하나다.세상 어디를 가도 전례와 교리, 교회구조가 똑같다. 미국 뉴욕 번화가에 있건 아프리카 밀림에 있건 지구상의 모든 가톨릭교회는 하나의 믿음으로 베드로 사도 후계자인 교황과 연결돼 있다. 즉 모든 신자가 한 가족 한 형제다. 그러니 패전국의 학병. 그것도 일본군 군복을 입고 있는 한국 신학생이 그 섬에서 미국 형제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가톨릭 신학생이란 신분이 알려진 덕에 그 해 성탄 대축일 미사에 참례하는 행운까지 얻었다. 성탄절 직전. 군종 목사는 수천 명 되는 일본군 중에 유일한 가톨릭 신자인 나를 불러 “유황도에 있는 군종 신부가 여기 와서 성탄전야 미사를 할 예정인데 원하면 참례해도 좋다”고 말했다. 부도에 군종 목사는 있었지만 군종 신부는 없었다. 미사참례라는 말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성탄전날 밤 미사가 봉헌되는 막사로 갔더니 미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아무래도 미사시간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벽면 십자가를 향해 서서(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방식)두 팔을 벌리고 전례를 거행하는 군종 신부님 뒷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체격이 건장한 미군들 틈에 끼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봉헌하는 미사였지만 내 마음은 내내 감동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1년 넘게 미사참례를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영성체 시간이 되자 당혹스러웠다. 1년 넘게 고백성사를 보지 못해 성체를 받아 모시러 나가면 안 되는데 시선은 자꾸 신부님 손에 들린 성체를 향했다.

당시 성탄미사는 3대 연속 봉헌됐다.사제는 자정미사를 신자들과 성대하게 봉헌한 뒤 나머지 미사 2대는 신자들이 남아있건 집에 돌아가건 상관하지 않고 연속해서 드렸다. 미사가 끝나면 잠깐이라도 고해성사를 본 뒤 다음 미사에서 성체를 모시면 되겠지만 늦게 도착해서 몇 번째 미사인지 알 길이 없었다. 만일 마지막미사라면 1년 만에 성체를 모실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잃는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 용기를 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니까 통회하는 마음으로 보시면 이해해 주실 거야’라고 자위하면서 성체를 받아 모셨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 미사가 아니었다. 미사가 끝나자 복사를 섰던 군인은 돌아가고 신부님 홀로 미사를 이어 드렸다. 나는 미사 순서와 복사 역할을 훤히 꿰뚫고 있는 터라 아무런 실수 없이 미사 집전을 도왔다.

미사가 끝나자 신부님은 제의도 벗지 않은 채 나를 껴안더니“자네는 누군가?” 하고 물었다.“한국에서 온 신학생”이라고 대답하자 “이렇게 감동적인 미사는 처음이다.”가톨릭은 인종,민족,언어,이념을 초월하는 종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그 신부님은 얼마 뒤 괌으로 사목 지를 옮기셨다. 미군 전투기 조종사 실종사건 재판의 증인으로 나선 노무자들과 괌에 체류하고 있던 나는 그 곳에서 신부님과 반가운 상봉을 했다. 미사에 참례하면 신부님은 항상 내게 복사를 맡기셨다. 그 곳에서 6개월 정도 머물다 일본을 거쳐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밝았다.


FBI가 나를 추적한 사연

불가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1977년 5월, 한인본당 사목방문과 노틀담대학교 명예 법학박사학위 수여식 참석을 겸해 미국에 갔을 때다. 학위 수여식 후 한인 공동첼를 방문하려고 시카고 공항에 내렸는데, 마중 나온 성콜롬반 외방선교 회 신부님이 “혹시 켈리 신부라는 분을 아세요?”하고 물었다.

퍼뜩 떠오르지가 않아 이리저리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신부님이 “해군 군종신부? 출신”이라는 힌트를 줬다.

해군 군종신부?…….아, 그 신부님! 부도랑 괌에서 미사할 때 내가 복사를 섰던 그 신부님. 맞아, 그분 성함이 켈리야. 그 때 소속이 시카고 교구라고 하셨어, 그런데 그 신부님을 아세요?”

“물론 알지요.우리 이웃 본당에서 사목하고 계시는데, 김 추기경님이 시카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내일 점심식사에 초대하셨어요.”

다음날 설레는 마음으로 캘리 신부님을 만나러 가는데 골롬반회 신부님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거기 마면 무척 놀랄 일이 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게 뭐냐고 물어도 “가보면 안다”면서 좀체 알려 주지를 않았다.

캘리 신부님과 32년 만에 재회를 했다. 얼마나 반갑던지 사제관으로 들어갈 생각은 안하고 문 앞에 서서 악수와 포옹을 번갈아 가며 한동안 인사만 나눴다. 드 때 노틀담대학에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도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한 터라 학위 수여식 사진이 전국 주요일간지에 실렸다. 켈리 신부님이 신문에 난 내 얼굴을 보고 30여 년 전 부도에서 만난 한국 신학생이란 걸 용하게 알아챈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 신부님과 몇 마디 주고 받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신부님은 우리에게 방해가 될까 봐 나가서 복도에 있는 전화를 받았다.그 때 골롬반회 신부님이 “저 전화 받으세요, 저게 바로 오늘의 '빅서프라이즈'입니다.”라며 방에 있는 수화기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김 추기경입니다.” “반가워요. 딕이라는 사람인데 저를 기억하겠어요?” “딕? 글쎄요, 죄송하지만,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부도에서 만난 해병대원, 딕을 모르겠어요?”

부도에서 해병대 대원들과 자주 마주치기는 했다. 몇 명 친해진 대원들과는 손짓 발짓 섞어 잡담을 주고받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도 했다.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 사람 얼굴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는 “쌘프란시스코 FBI에서 일하고 있어요.보고 싶으니 당장 만납시다.”고 말했다.

FBI(미 연방 수사 국)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시 내게는 공안 당국의 감시 눈길이 늘 따라붙었다.1971년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명동대성당 성탄 자정미사 강론에서 박 정권의 장기집권 술수을 비판한 뒤로 요주의 인물이 됐기 때문이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어떻게 한 뒤로 요주의 인물이 됐기 때문이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훤히 꿰뚫고 있던지 외국 공항에 도착해도 현지에 상주하는 정부요원들이 어김없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놀란 사람이 골롬반회 신부님이었다. 몇칠 전 한 남자가 신부님 숙소로 전화를 걸어“여긴 FBI인데, 한국에서 온 김수환 추기경 행방을 아는가?”하고 물었다는 것이다.잠결에 전화를 받은 신부님은 FBI에서 나를 찾는다기에 무슨 큰 일이 난 줄 알고는 “그럼 당신도 켈리 신부를 아는가? 마침 마침 김 추기경이 켈리 신부를 만날 예정인데. 그 때 3자 전화상봉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딕(Dick,리차드 애칭)을 잠깐 만났다. 그는 언행이 거칠기 짝이 없는 해병대 대원들 중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점잖은 친구였다. 나는 양반 중의 양반인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꽤 정이 들었는데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당신은 쉽게 잊을 우 없는 친구”라며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유학 길에 오르기 전에 외삼촌과 찍은 내 사진이었다. 맙소사! 부도에서 헤어질 때 건네준 정표(情表)를 32년째 간직하고 있다니….“그나저나 나를 어떻게 찾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파안대소 하며 말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니까 영락없이 그 때 만난 신학생이더라고요. 노틀담대학 측에 알아보니까 ‘시카고에서 골롬반회 신부를 만날 예정’이라는 단서가 나왔어요, 그 때부터 말하자면 FBI 범인추적시스템을 가동한 거지요.”

세계 최고 수사기관이라는 FBI에서 무슨 시스템까지 동원해 내 행방을 추적했으니 ‘빅 서프라이즈’가 맛긴 맞는 것 같다

[평화신문, 제731호(2003년 7월 6일),김원철 기자][편집 : 원 요아킴]


♣갈멜수도회 수도자들의 삶을 노래한/故 최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