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4월12일 키바소의 福者 안젤로 님..등

H-Simon 2011. 4. 11. 22:23

 

 

4월12일(화)   

키바소의 福者 안젤로 님..등

 

 

 

키바소의 복자 안젤로(Angelus)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해

 

 


                        

 

   ▶안젤로(4.12)
 
성인명 안젤로(Angelus)
축일 4월 12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수사
활동지역 키바소(Chivasso)
활동연도 1411-1495년
같은이름 안겔로, 안겔루스, 안젤루스

 

키바소의 복자 안젤로(Angelus)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키바소에서 태어난
안젤루스 카를레티(Angelus Carletti, 안젤로)의 양친은
피에몬테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볼로냐(Bologna) 대학에서 수학하여 민법과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고향에 돌아와서 주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안젤루스는 모친이 사망하자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형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제노바(Genova)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안젤루스의 장상은 즉시 그가 선교열이 대단하며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감지하고 그를 훌륭한 인물로 양성하였다.
그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온정을 베풀었고,
환자들을 돌보면서 탁발 생활을 계속하였다.
제노바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9월 15일)도 그에게 늘 자문을 구하였고,
사보이아(Savoia)의 공작 카를로 1세는 자신의 고해신부로 그를 모셨다.
그는 소위 “숨마 안젤리카”(Summa Angelica)라는 윤리 신학서를 저술하였다.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의 임기 중 모슬렘의 침공이 있었을 때
작은 형제회는 위험에 처한 지역 국민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안젤루스는 언제나 제일 위험한 지역에서 신자들을 돌보았다.
1491년 80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선교단의 책임을 맡을 정도였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Innocentius VIII)가 그를 주교로 승품시키려 하자
그는 끝내 거절하였다.
그는 항상 겸손하였다. 여든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구걸하였다.
그는 마지막 2년을 쿠네오(Cuneo)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84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승인되었다.

      

       사회적 지위와 부를 모두 멀리하고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고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찾아 온정을 베풀며

       주교직 승품마저 끝내 거절하시고

       여든의 나이에도 구걸의 천상생할을 즐기신 福者안젤로님이시여

       세속적 향략에 물두하는

       어리석음을 벗어날 수 있도록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요셉 모스카티(4.12)
 
성인명 요셉 모스카티(Joseph Moscati)
축일 4월 1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의사, 과학자
활동지역 나폴리(Napoli)
활동연도 1880-1927년
같은이름 모스까띠, 모스카띠, 요세푸스, 요제프, 조셉, 주세페, 쥬세페

 


   성 요셉 모스카티(Josephus Moscati)는 1880년 7월 25일 이탈리아
베네벤토(Benevento)에서 판사인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로사 사이의
아홉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나 6일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1884년에 나폴리로 이사하여, 1888년에 첫영성체를 하였다.
1897년 나폴리 대학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던 모스카티는
어려서부터 깊은 신앙과 친절한 성품을 지녔는데,
대학 시절에도 학업에 열중하면서 기도에 충실하여
매일미사 참례를 하였다.

   1903년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의사로서
바쁘고 고된 생활을 시작한 그는 정성껏 환자들을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짐으로써
교회를 떠나 있던 많은 사람들을 신앙생활로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는데,
이들을 무료로 진료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들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나폴리의 중심가에 자리 잡은 그의 진료소에는
그에게서 진료와 마음을 위안을 받으려는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처럼 과중한 활동 중에도 모스카티는 의학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
32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11년에는 나폴리 대학의 화학생리학 주임교수로 임명되었고,
또 빈(Wien)과 에든버러(Edinburgh)에서 개최된 국제 생리학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한편, 1906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였을 때는 즉시 피해 지역으로 달려가
위험을 무릅쓰고 인근 병원의 환자들을 옮기는 작업을 거들었으며,
1911년 콜레라가 창궐하였을 때에는 이 전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병원의 책임자로도 활약하였다.

   1919년 40세도 안된 나이에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의 책임자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된 모스카티는,
1927년 4월 12일 병원에서의 오전 진료를 마치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후에 자신의 집에서 환자를 진료하던 중 갑작스런 발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나폴리 각계각층의 시민들은 달려와
“의사 성인, 쥬세페 모스카티가 죽었다”고 애도하였으며,
그를 추모하고 그의 전구를 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주 누오보(Giesu Nuovo) 성당에 안치된 그의 무덤은 항상 꽃으로 덮였다.
그로부터 4년 뒤 모스카티의 뛰어난 덕행과 전구를 통한 기적적 치료에 대한
증거와 증언을 수집하기 위한 교구 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聖年인 1975년 11월에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식이 거행되었고,
1987년 10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정성을 다한 인술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

       그리고 영혼이 메마른 사람들에게 주님 사랑을 깨닫게 하신,

       요셉 모스카티 성인의사시여

      

        마침 오늘 담양 이태석 신부님의 묘소를 찾아,   

        시대의 등불이 되신 두 분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향한 님들의 기도

        저희의 아기들도 그 사랑을 배우며 자라나도록 빌어주소서!...............아멘

 

                                                                                                              **굿뉴스 가톨릭 정보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