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4월 2일 이집트의 聖女 마리아님..등

H-Simon 2011. 4. 1. 17:38

 

 

4월 2일(토)  

이집트의 聖女 마리아님..등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Maria)

 

 

 

 

 

 

 

    ▶마리아(4.2)
 
성인명 마리아(Mary)
축일 4월 2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이집트(Egypt)
활동연도 +500년경?
같은이름 메리, 미리암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Maria)


   젊은 테오도시우스의 통치 때 팔레스티나(Palestina)에는
한 곳에서만 43년 동안 살았고,
하느님만 섬기는 성 조시무스(Zosimus, 4월 4일)라는 수도자가 있었다.
그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요르단으로 향하였으나,
자신은 자기 수도원과 20일 간의 거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기도시간이 되어 시편을 외우고 있었다.
이때 그는
“조시무스 신부님, 나는 여자입니다.
당신의 겉옷을 던지면 나를 볼 수 있습니다”라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의 주인공이 곧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이다.
그녀는 이집트 여성으로 17년 동안이나 거리의 여성으로 살아 왔는데,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28세 때 그녀는 예루살렘으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러 가는
일단의 무리들과 합류하게 되었는데,
여행을 하는 도중에 자기의 악습을 고치지 못하고
열심한 순례자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예루살렘에 당도하여 성당에 들어가려 하니,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듯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서 있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윽고 눈을 들어 마리아상을 바라보니,
그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고 한다.
그때서야 그녀는 밝은 마음으로 성당으로 들어갔고 깊이 통회하니,
“너는 요르단으로 가서 여생을 지내라”고 명하여
이렇게 사막에 산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요르단 사막에서 47년 동안이나 사람 한 사람 구경하지 못하고 살았다.

   성 조시무스는 그녀를 위해 성체를 영해 주고,
다음 해에 만나기로 하고 돌아왔다.
다음 해에 그가 다시 만나 성체를 영해 주고
그녀가 약속한 두 번째 지점으로 갔으나 그녀는 이미 운명하고 있었다.
“조시무스 신부님, 가련한 마리아를 장사지내 주십시오.” 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이 사실을 자기의 모든 형제들에게 이야기 해 주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파울라의 프란치스코(4.2)
 
성인명 프란치스코(Francis)
축일 4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설립자
활동지역 파울라(Paula)
활동연도 1416-1507년
같은이름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울라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416년 3월 27일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 지방
코센차(Cosenza)의 파울라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프란체스코)
산마르코(San Marco)에서 프란치스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13세 때에 산마르코 수도원에서 1년 동안 생활하면서
기도와 금욕과 겸손을 익혔다.
 
그리고 15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영지인 파울라 교외에서 홀로 지내며
6년 동안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동료들이 불어나서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공동체가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Minimi Fratres, least brothers)의 시작이었다.
그는 자신이 은수생활을 하던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회개와 애덕 그리고 겸손을 특히 강조하는 회칙을 확정하였으며,
세 가지 서원 외에 단식과 음식의 절제 서원을 덧붙였다.
또한 그는 3회원과 수녀회를 위한 회칙을 만들었다.

   그의 생활이 거룩하고도 엄격하였던 만큼 그의 영적 영향 또한 커졌고
특히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명성은 곧 프랑스로 번졌다.
그가 지닌 예언의 은혜 역시 뛰어났고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수도회는 1474년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로부터
승인을 받았는데,
이때 이 수도회의 이름은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의 은수자회'였다.
그 뒤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로부터 수도회의 설립을 허가받으면서
그 이름을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로 변경하였다.

   그의 명성이 죽어가는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의 귀에까지 전해져서
왕이 그를 보기를 원하자 교황은 그가 프랑스로 가도록 명하였다.
 왕은 성 프란치스코만이 자신을 치료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록 치유되지는 못하였지만 큰 위로를 받고 만족했으며,
이 때문에 루이의 아들인 샤를 8세가 성 프란치스코의 친구가 되어
프랑스 내의 여러 곳에 수도원을 지어주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생애의 후반기 25년을
프랑스의 플레시(Plessis) 수도원에서 지냈는데,
마지막 3개월 동안은 투르(Tours)에서 고독하게 지내면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그는 파스카 목요일에 회원들에게 사랑의 실천과 엄격한 생활을 당부한 후,
다음날 총장 대리를 선출하고 영성체를 한 다음 요한 복음 수난기를 들으면서
 1507년 4월 2일 조용히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그가 설립한 수도회의 여러 수도원들에 나뉘어 묻혔으며,
1519년 5월 1일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43년 3월 27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해상 여행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그의 많은 기적들이 바다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굿뉴스 가톨릭 정보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