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2월 19일 聖콘라도, 聖메스로프님..등
H-Simon
2011. 2. 18. 20:03
2월 19일(토)
聖콘라도, 聖메스로프님..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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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첸차의 성 콘라도(Conradus) |
성 콘라두스(Conradus, 콘라도)는 이탈리아 귀족 가문 출신의 기혼자였다.
어느 날 그는 사냥을 나갔다가 관목에 불을 지르는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풍이 휘몰아쳐서 옥수수 밭을 비롯하여 인근 마을까지 불태우는
불상사로 번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는 어느 가련한 사람이 방화한 것으로 거짓 증언을 하여
그에게 사형까지 언도되었다.
그러나 그 때 그 사람이 모든 사실을 폭로하여 콘라두스는
치명적인 명예 손상과 재산을 잃게 되었다.
이 사실을 심각하게 또 정직하게 반성하게 된 그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수하 사람들을 해방시켰음은 물론
아내도 클라라회에 입회하도록 주선했고
또 자신은 작은 형제회 재속 3회원이 되어 은수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시칠리아(Sicilia)를 지나 노토(Noto) 계곡에 당도하여 30여 년 동안 살았다.
만년에 그의 영성은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고,
피초니(Pizzoni)에서 그가 원하던 대로 보다 고적한 생활을 하였다.
성 콘라두스 자신은 숨은 생활에 원했지만 그의 성덕이 워낙 뛰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도움과 지도를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임종하기 얼마 전에 그는 주교를 방문하여 고해성사를 본 후 다시
노토 계곡으로 돌아와서 새들과 야생동물들을 벗 삼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의 장례식은 성 니콜라우스(Nicolaus) 성당에서 거행되었고,
그의 무덤은 순례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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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메스로프 마쇼토(Mesrop Mashtots) |
아르메니아의 타론(Taron)에서 태어난 성 메스로프는
장성한 후 아르메니아의 정부 관리가 되었으나 마음을 바꾸어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성 대 나르세스(Narses, 11월 19일)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그리스어, 시리아어 그리고 페르시아어를
공부하는데 전념하여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성 대 이사악(Isaac, 9월 9일)과 합류하여 아르메니아 선교활동의
선봉장이 되었음은 물론 아르메니아어의 알파벳 구성에 크게 기여하였고,
신약성서와 잠언서를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였다.
또한 그는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Georgia)에 학교를 세웠으며,
그루지야 알파벳을 창제하였고, 죽을 때까지
발라르샤파트(Valarshapat)에서 설교하였다.
그는 80세를 넘기고 선종하였는데 '선생님'이 그의 별명이었다.
이는 그의 탁월한 교육 활동 때문이었다.
주교였던 것으로 전해지는 그는 때때로 메스로브(Mesrob)로도 불린다.
그의 예전 축일은 11월 25일이었다. |

베네벤토의 성 바르바토(Barbatus) |
성 바르바투스(바르바토)는 이탈리아의 베네벤토 출신으로서
인근 모르코나(Morcona)의 성 바실리우스(Basilius) 성당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는 특히 이교 신앙 타파에 주력했는데,
로무알드 공작을 비롯하여 수많은 귀족들을 미신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그 당시 베네벤토 인근의 도시 국가들은 콘스탄스 2세 황제군으로부터
큰 곤경에 처해 있었는데, 성 바르바투스가 미신을 타파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설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주민들이 공경하던 큰 나무를 베어내고 황금 독사를 녹여버렸다.
이로써 주민들의 미신은 사라졌고 그리스도교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이즈음에 베네벤토의 일데브란드(Ildebrand)를 계승하여 주교로 착좌하였다. 680년 그는 교황 성 아가토(Agatho, 1월 10일)의 요청으로 로마(Roma)로 가서
공의회 중에 교황을 보좌하였고,
다음해에는 그리스도단의론(monotheletism)에 대항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열린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
코르도바의 복자 알바레스(Alvar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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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레스의 출생지는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 또는 에스파냐의
코르도바라는 주장이 있는데 코르도바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는 1368년에 그곳의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놀라운 설교가가 되었고,
초기에는 에스파냐의 안달루시아(Andalucia)에서,
그 후에는 이탈리아에서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는 또 황녀 카타리나(Catharina)의 고해신부 겸 고문이 되어
어린 왕 요한 2세의 초기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와 그의 동료 수도자들은 낮에는 설교 일을 하고
밤에는 거의 온밤을 지새우면서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들의 식사는 애긍에 의존하였는데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코르도바의 시장에 나가 구걸하였다.
그의 회개생활은 날이 갈수록 엄격해졌다.
그는 자비의 성모께 봉헌된 성당?무릎으로 걸어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41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는 알바로(Albaro)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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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 만으로 만족하도다
아빌라의 대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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