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월28일 聖 토마스 아퀴나스님..등

H-Simon 2011. 1. 27. 17:35

 

 

128일 (금) 

聖 토마스 아퀴나스님..등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베드로의 고백 외..

                                                                                       

 

 

 
 
 
 
 
    ▶토마스 아퀴나스(1.28)
 
성인명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축일 1월 2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신학자, 교회학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224/1225-1274년
같은이름 도마, 아퀴노, 토마스아퀴나스, 토머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이탈리아 로마(Rome)와 나폴리(Napoli)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Roccasecca) 가족성(城)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노의 백작 란둘프(Landulph)와 어머니 테오도라(Theodora)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불과 다섯 살의 나이로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의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고,
1239년경에는 그의 교육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나폴리 대학교를 다녔으며,
1244년에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이때 가족들은 그를 강제로 데려다가
15개월 동안이나 로카세카 성에 감금시킨 적도 있었다.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1245년에 다시 수도회로 돌아갈 수 있었고,
1245년부터 3년 동안을 파리(Paris)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프랑스 파리와 독일 쾰른(Koln)에서
성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1월 15일)의 문하萱막?공부하여
125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250년과 1551년 사이의 어느 때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성 토마스의 스승이었던 성 대 알베르투스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없는 황소는 그의 울부짖음으로 전 세계를 가득 채울 것이다."
그 후 그는 주로 나폴리(Napoli), 아나니(Anagni), 오르비에토(Orvieto), 로마(Roma)
그리고 비테르보(Viterbo)에서 가르쳤으며,
1259-1264년 사이에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Summa Contra Gentiles) 
마무리 지으면서 그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의 집필에 착수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1269년에는 수도사제와 교구사제간의 논쟁에 말려들었고,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의 시게르(Siger)와 요한 페캄(John Pecham)
그리고 파리의 주교 에티엔느 탕피에의 철학적인 가르침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리옹(Lyon) 공의회에 참석하여 동방과 서방 교회의 재일치 가능성을
토의하라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1월 10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리옹으로 가는 도중 테라치나 교외 포사 누오바(Fossa Nuova)에 있는
시토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7일 운명하였다.

   그는 1323년 7월 21일에 교황 요한 22세(Joannes XXII)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교황 비오 5세(Pius V)에 의하여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1880년에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에게 붙여진 칭호는 '보편적 박사'(Doctor Communis) 또는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이다.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에서
모든 신학생들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주요 사상은 곧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자이며,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징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이다.
그의 미완성의 대작인 "신학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들여질 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지적 능력 외에도 아퀴나스는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그는 환시, 탈혼 그리고 계시를 체험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성무일도를 집필했고,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많은 찬미가도 지었다.
 
 
또한 그는 주님의 기도(Pater Noster),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m)
그리고 성서 일부에 대한 주해서를 썼다.
한마디로 그는 지성과 성덕의 금자탑이었다.
 
 
 
 
 
    ▶베드로 놀라스코(1.28)
 
성인명 베드로 놀라스코(Peter Nolasco)
축일 1월 2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189-1258년
같은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 베드로 놀라스코(Petrus Nolasco)에게 발현한 동정 마리아(Maria)

   성 베드로 놀라스코(Petrus Nolasco) 프랑스의 귀족 가문 태생으로
15세 때에 부친과 사별하면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 후 그는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로 가서 막대한 그의 재산을
무어인들에게 포로로 잡힌 그리스도인들의 석방 대속금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는 어떤 환시를 보고,
그 지시에 따라 그리스도인 노예 해방을 위한 수도회 설립을 결정하였다.
그는 성 라이문두스(Raymundus, 1월 7일)의 도움으로
'속량의 성모회'(메르체다리오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도회는 아라곤(Aragun)의 왕 야고보의 지지와 더불어 1235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회원들은 노예 석방을 위한 일은 무엇이든 하였다.
그런 과감한 행동을 하던 성 베드로도 한때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1628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664년 보편교회에서 그의 축일을 기념하도록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