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월1일 聖벤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님..등

H-Simon 2010. 12. 31. 18:44

 

 

11일(토)

聖벤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님..등

 

 

 

마체라타의 성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Vincentius-Maria Stram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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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1.1)
 
성인명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Vincent Mary Strambi)
축일 1월 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마체라타(Macerata)
활동연도 1745-1824년
같은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마체라타의 성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Vincentius-Maria Strambi)

   성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Vincentius-Maria Strambi)는 이탈리아의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에서 어느 약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주 짓궂게 장난치는 아이였지만,
맨발이거나 혹은 남루한 옷을 입은 부랑아를 보면
자기의 외투와 신발조차 벗어주는 갸륵한 소년이었다.
그는 교구사제가 될 마음으로 공부했으나
서품 직전에 십자가의 성 바오로(Paulus, 10월 19일)의 영향을 받고
예수 고난회원이 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극심하던 부모의 반대를 이기고 마침내 수련을 받게 되었다.

   그는 수도원 내의 여러 직책을 맡았고 1781년에 관구장이 되었으며,
또 1801년에는 자신이 극구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체라타와 톨렌티노(Tolentino)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불굴의 노력은 이탈리아 전역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놀라운 쇄신을 불러일으키는 주교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808년 그는 나폴레옹의 정책에 반대하여 추방되었으나,
1813년 나폴레옹이 실각함으로써 교구로 돌아왔다.
교황 비오 7세(Pius VII) 서거 때에 그도 역시 사임하였으나,
그의 열렬한 친구이던 레오 12세(Leo XII)의 등극과 더불어
그는 교황의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이 모든 직책에서도 그는 수도생활의 정신을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복녀 안나 마리아 타이기(Anna Maria Taigi, 6월 9일)가 예언한
12월 31일에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셨고,
1824년 1월 1일 79살의 생일날에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그는 192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풀젠시오(1.1)
 
성인명 풀젠시오(Fulgentius)
축일 1월 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증거자
활동지역 루스페(Ruspe)
활동연도 467-533년
같은이름 풀겐티오, 풀겐티우스, 풀젠시우스, 풀젠티오, 풀젠티우스

 

루스페의 성 풀젠시오(Fulgentius)


   카르타고(Carthago)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파비우스 클라우디우스 고르디아누스 풀겐티우스
(Fabius Claudius Gordianus Fulgentius, 풀젠시오)
어머니가 과부가 되면서부터 가문의 영지를 관리하였는데,
그의 탁월한 능력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훌륭한 교육을 받았던 그는 카르타고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으나
2년 후에 사임하면서부터 정통파 주교인 파우스투스(Faustus)가 지도하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507년 그는 루스페(오늘날 튀니지의 쿠디아트 로스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는 아리우스파(Arianism)인 반달족(Vandals)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파 주교들이
사르데냐(Sardegna) 섬으로 추방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그런대로 교구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사르데냐 섬의 칼리아리(Cagliari)에 유배된 동안에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반달족의 왕인 트라시문드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왕은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아리우스파 성직자와의 토론회를 주선하였으나
풀겐티우스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518년에 사르데냐 섬으로 다시 추방해버렸다.

   그 후 왕의 후계자인 힐데릭이 귀향을 허가하여 정상적으로 집무하였는데,
그의 재임 기간 대부분은 유배생활로 보냈다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신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의 이름만 들어도
아리우스파 성직자들은 겁을 내었다.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배격하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사목자였다.
그 후 그는 시르시니아(Circinia) 섬에 있는 수도원으로 은거하였다가
루스페로 돌아온 얼마 뒤에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