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2월29일 聖토마스 베케드, 聖다윗님..등

H-Simon 2010. 12. 29. 00:12

 

 

1229일(수)

聖토마스 베케드, 聖다윗님..등

 

   

 

 

캔터베리의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의 순교

 
    

 

 

 

 

 

 

 

    ▶토마스 베케트(12.29)
 
성인명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축일 12월 2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캔터베리(Canterbury)
활동연도 1118-1170년
같은이름 도마, 베케트, 베켓, 토머스
 

캔터베리의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의 순교


   런던의 주 장관인 길버트 베케트(Gilbert Becket)와 마틸다(Matilda)
아들로 태어난 성 토마스 베케트는 노르만족의 후손이다.
그는 런던에서 출생하여 서리(Surrey)의 머튼 프리오리(Merton Priory)에서
수학했으며, 런던에서는 법률을 공부하고
파리 대학교에서도 그의 전문 과목을 계속 연구하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궁핍한 환경으로 내몰린 그는
1141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관으로 들어갔다.
이때 테오발드(Theobald) 대주교는 성 토마스 베케트가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와 프랑스의 오세르(Auxerre)에서 법률을 공부하도록
조처해 주었다.

   그는 1154년에 부제로 서품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테오발드 대주교의 명을 받고 로마(Roma)를 오가면서
중요한 일들에 관여하였다.
1155년 성 토마스 베케트는 헨리 2세 왕에 의하여
잉글랜드(England)의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국왕 다음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헨리 2세를 수행하여 프랑스 툴루즈(Toulouse)로 원정을 나갈 때에는
부대장도 맡았다.
1161년 테오발드 대주교가 서거하자 헨리 2세는
성 토마스 베케트를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물론 그는 이 직책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1162년 그는 수상직을 사임한 후 사제품을 받고서 대주교로 착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엄격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1166년 성 토마스 베케트는 소위 '클라렌든 칙령'을 거부하였는데,
이 법은 교회 법정에서 행해야 할 성직자의 권리와
교황청에 호소하는 권리를 부인하는 악법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성 토마스 베케트는 프랑스로 축출되었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이 사실을 교황에게 상소하였지만
헨리 2세와 반목하기를 원치 않았던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 교황은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이처럼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케트가 반목하고 있을 때,
성 토마스 베케트는 교황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퐁티니(Pontigny)
시토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166년 헨리 2세가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지역에서
모든 시토회 회원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할 때,
성 토마스 베케트는 상스(Sens) 교외의 성 콜룸바(Columba) 수도원으로 가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Louis VII)의 보호를 받았다.
루이 7세의 노력에 의해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케트는 평화 협정을 맺었고,
비로소 그는 잉글랜드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정치적인 사건 때문에 그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이 사건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사망 즉시 순교자로 선포되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그를 성인으로 공포하자 헨리 2세는 공적으로 잘못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해가 모셔진 성 토마스 베케트의 경당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모이는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은 아주 유명하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기꺼이 행하였다."
 
영국의 시인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그를 소재로 "대성당의 살인"을 썼다.

 

 

 

 

 

    ▶다윗(12.29)
 
성인명 다윗(David)
축일 12월 2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 예언자, 구약인물
활동지역 이스라엘(Israel)
활동연도 +10세기BC
같은이름 다비드, 데이비드

 

이스라엘의 왕 성 다윗(David)


   성 다윗은 이새의 아들로서 유대와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다윗 왕조의 태조로서 예루살렘에서 기원전 1000-961년 사이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이었다.
 
성 다윗은 유대의 베들레헴 출신이고 룻기 4장 18-22절에 의하면
보아스와 모압 여인 룻 사이에서 태어난 오벳의 손자이다.
그에 대해서는 구약성서 열왕기 상하권과 사무엘 상하권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에브룰포(12.29)
 
성인명 에브룰포(Ebrulf)
축일 12월 2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활동지역 우슈(Ouche)
활동연도 517/626-596/706년
같은이름 에브룰뽀, 에브룰뿌스, 에브룰푸스, 에브룰프

 

우슈의 성 에브룰포(Ebrulphus)


   성 에브룰푸스(Ebrulphus, 에브룰포)
626년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바이외(Bayeux)에서 태어나
힐데베르트 3세(Childebert III)의 궁중에서 성장하고 결혼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수녀원으로 들어갔고,
그는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국왕의 허가를 받아 수도자가 되려고 준비하였다.
마침내 그는 바이외 교구의 어느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즉시 그는 성덕과 인격에서 높은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심한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자
세 명의 동료 수도자와 함께 노르망디의 우슈 숲 속으로 은거하였다.
이들 은수자들은 움막도 없이 개울가에서 지내면서
엄격한 보속생활을 계속하였다.
한 농부가 그들을 보고 크게 놀라서 이 숲은 맹수가 득실거리고
먹을 것이 없는 곳이라고 일러 주자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굳게 믿고 살겠습니다.”
이 농부는 그 다음날 빵과 꿀을 가져온 뒤에
그들과 함께 보속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의 공동체가 인근 주민들에게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개종하였으며,
늘어나는 제자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남자와 여자를 위한
다른 두 수도원을 지었다.
 
 성인은 은수자들에게 노동을 권유했고,
자신의 일로써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성 에브룰푸스는 80세가 되어 운명하였는데,
그는 성체와 소량의 물로 6주간 동안 지낸 적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