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2월22일 聖 프란치스카 카브리니님..등

H-Simon 2010. 12. 21. 17:14

 

 

1222(수) 

聖 프란치스카 카브리니님..등

 

  

 

미국의 성녀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Francisca Xaveria Cabrini)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12.22)
 
성인명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Frances Xaveria Cabrini)
축일 12월 22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미국(USA)
활동연도 1850-1917년
같은이름 방지가, 프란체스까, 프란체스카, 프란치스까, 프랜시스

 

미국의 성녀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Francisca Xaveria Cabrini)


   농부인 아고스티노 카브리니(Agostino Cabrini)
스텔라 올디니(Stella Oldini)의 13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인
성녀 카브리니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Lombardia)의 산탄젤로 로디지아노(Sant'Angelo Lodigiano)에서 1850년 7월 15일에 태어나
마리아 프란치스카 사베리아(Maria Francisca Xaveria, 프란체스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학교 교사가 될 꿈을 꾸었으나
18세 때 고아가 되자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건강상의 문제로 두 공동체로부터 입회를 거부당하였으나,
1874년에 안토니우스 세라티(Antonius Serrati) 몬시뇰의 초청을 받고
곤란한 상태에 빠진 섭리의 집이란 고아원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집의 설립자인 안토니아 톤디니(Antonia Tondini)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히자 토디(Todi)의 주교는 프란치스카로 하여금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녀는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코도뇨(Codogno)의 버려진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으로 이주하여
소녀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성심의 선교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녀회는 1880년 주교의 승인을 받은 즉시
그루멜로(Grumello), 밀라노(Milano) 그리고 로마(Roma)로 퍼져나갔다.

   1889년 성녀 프란치스카는 미국 뉴욕(New York)의 대주교
코리건(Corrigan)의 초청으로 뉴욕으로 가서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위한 일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성녀 프란치스카가 설립한 성심의 선교 수녀회는
미국에까지 확장되었으며,
1892년 뉴욕의 콜럼버스(Columbus)에 첫 번째 병원을 개설하였다.
그 후 중남미와 영국으로 진출하였고,
1907년에는 성좌로부터 회헌의 승인을 받았다.
1917년 12월 22일 그녀가 시카고(Chicago)에서 운명할 즈음에는 이미 50개
이상의 병원과 학교, 고아원과 수도원 등 괄목할만한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1909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고, 1938년 11월 13일에 복자품에 올랐으며, 1946년 7월 7일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로부터 시성됨으로써
미국 시민으로는 첫 번째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는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하여 이주민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플라비아노(12.22)
 
성인명 플라비아노(Flavian)
축일 12월 2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4세기경
같은이름 플라비아누스, 플라비안

 

성 플라비아노(Flavianus)..성녀 비비아나의 아버지


   5세기 때 로마(Roma)에 성녀 비비아나(Bibiana, 12월 2일)를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고, 그녀의 어머니인 성녀 다프로사(Dafrosa, 1월 4일)에 대한
공경이 보편화되었지만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성녀 비비아나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신앙 때문에 고문을 받고 아콰팡당트로 추방당한
로마의 전 지사인 성 플라비아누스(Flavianus, 플라비아노)의 딸이었다.
 
성 플라비아누스가 죽은 뒤에 그의 아내 성녀 다프로사도 참수를 당했고,
그들의 딸인 성녀 비비아나와 동생 성녀 데메트리아(Demetria, 6월 21일) 역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다시 체포되었다.
성녀 데메트리아는 이때 바로 죽었고,
성녀 비비아나는 후에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