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1월27일 聖프란치스코 파사니님..등
H-Simon
2010. 11. 26. 08:37
11월27일(토)
聖프란치스코 파사니님..등
루체라의 성 프란치스코 안토니오 파사니(Franciscus Antonius Fasani)
루체라의 성 프란치스코 안토니오 파사니(Franciscus Antonius Fasani) |
성 프란치스코 파사니(Franciscus Fasani, 프란체스코)는
1681년 8월 6일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Puglia)의 루체라에서 태어나
도나투스 안토니우스 요한 니콜라우스 파사니(Donatus Antonius Joannes Nicholaus Fasani)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10세 되던 해에 부친을 잃고 새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의 새 아버지는 좋은 사람으로 프란치스코를 콘벤투알 수도원 학교로 보내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는 15세 때에 몬테 가르가노(Monte Gargano)의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1705년 9월 11일 모든 학업을 마치고 아시시(Assisi)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로마(Roma)에서 다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여 1707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루체라의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늘 겸손하게 생활하면서 가난한 사람, 병자 그리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또 그의 학문적 소양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알기 쉽게 설교하고
또 교리를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뛰어난 교수이자 설교가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그는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가 반포되기 전에
이미 이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졌고,
사람들이 즐겨 부를 수 있는 찬미가를 쓰기도 했다.
또한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를 위한 9일 기도를 작성했으며,
지금도 루체라에서 이런 관습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1742년 11월 29일 루체라의 수도원에서 선종하였고,
1951년 4월 15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6년 4월 1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페르시아의 성 야고보(Jacobus) |
페르시아의 두 번째 큰 박해의 희생자 중에서
성 야고보(Jacobus)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국왕 예즈디제르드 1세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그의 권유로 국왕이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하는 전투를
중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국왕이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살해되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공적으로 죄인임을 선언하였다.
이때 왕위 계승자가 사람을 보내자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재산은 전부 몰수되었다.
그는 다만 의로운 죽음을 맞이하길 기도할 뿐이었다.
그는 손가락, 발가락 등이 잘리는 고문을 비롯하여 사람으로서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

비지냐노의 성 후밀리스(Humilis) |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의 비지냐노 출신인 성 후밀리스는
세례명으로 루카 안토니오(Lucas Antonio)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농부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 18세 때에 작은 형제회 회원이 되려고
결심하였으나, 그로부터 9년 뒤에야 평수사로 입회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옷에다 ‘후밀리스’(낮은, 겸손한 등의 뜻을 지닌 라틴어)란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면서 겸손을 비롯한 모든 덕을 실천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였다.
이윽고 그는 유식한 형제들보다 더욱 훌륭한 지혜를 지닌 수사로 성장했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의 초청으로 로마(Roma)를
방문한 사실도 있었다.
그는 병으로 임종을 맞이했는데, 죽을 때까지 그의 고행은 중단되지 않았다.
그는 1882년 1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2년 5월 19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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