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1월19일 聖라파엘 칼리노프스키, 聖오바드야님..등

H-Simon 2010. 11. 19. 09:01

 

 

11월19일(금)

聖라파엘 칼리노프스키, 聖오바드야님..등

 

성 라파엘 칼리노프스키(Raffaele Kalinowski) 

                                   

 

 

 

 

 

    ▶라파엘 칼리노프스키(11.19)
 
성인명 라파엘 칼리노프스키(Raphael Kalinowski)
축일 11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활동지역
활동연도 1835-1907년
같은이름 칼리노브스키, 칼리노스키, 칼리노우스키

성 라파엘 칼리노프스키(Raffaele Kalinowski)


   성 라파엘 칼리노프스키 신부는 1835년 9월 1일
빌나(Vilna,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Vilnius)에서 귀족 출신의
저명한 수학교수인 안드레아 칼리노프스키(Andreas Kalinowski)
요세파 포이온스카 칼리노프스키(Josepha Poionska Kalinowski)의 아들로
태어나 요셉(Josephus)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빌라에 있는 귀족들을 위한 학회에서 아버지로부터 수학하여
학업에 있어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었다.
1851년부터 다음해까지 그는 호리호르키(Hory-Horky)에 있는 농업학교에서
동물학, 화학, 농학, 양봉을 배우고, 1853년부터 1857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Sankt Petersburg)에 있는 공병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공학 학위를 취득하고 위관급 장교로서 공병학교의 수학강사로 있으면서
1859년에는 쿠르스크-키예프-오데사(Kursk-Kiev-Odessa)를 잇는
철도의 설계를 담당하였다.
1862년에 대위로 승진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로 배치된 그는
그곳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모든 비용을 제공하며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와서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1863년 러시아의 압제에 대항하여 폴란드 반란이 발발했을 때
그는 러시아 군대에서 제대하고 빌나 지방의 반란정부의 각료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죄수에게 사형을 선고하거나 집행하지 않겠다는 양해를 구했다. 1864년 3월 24일 러시아에 체포된 그는 반란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정치적 희생양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러시아 정부는
다시 그의 형을 시베리아(Siberia)에서 10년간의 중노동으로 감형하였다.
복역 기간 중 그는 놀라우리만큼 강한 정신력과 인내심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
동료 죄수들에게 기도의 정신과 평온함 그리고 희망을 갖도록 도우며
위로할 줄 알았다.

   1874년 풀려난 그는 리투아니아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프랑스
파리(Paris)로 가서 3년 동안 개인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877년 마침내 그는 오랫동안 간직해 온 성소에 응답하여
오스트리아의 그라츠(Graz)에 있는 맨발의 카르멜회에 입회하여
성 요셉의 라파엘(Raphael a Sancto Ioseph)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헝가리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882년 1월 15일 크라쿠프(Krakow)
근처의 크체르나(Czerna)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도적 열정에 불탔던 그는 신앙을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바쳤고,
다른 카르멜회 수사와 수녀들이 완덕의 산에 오르도록 도와주었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에 빠진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교회의 일치를 위해 그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래서 그의 장상은 그에게 많은 중요한 임무를 맡겼고,
죽을 때까지 그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실행하였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던 그는 1907년 11월 15일 마침내
하느님께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그는 바도비체(Wadowice)에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서 선종하였고,
그의 유해는 크체르나에 있는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성덕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놀라우리만큼 칭송을 받았다.
1934년부터 크라쿠프 교구에서 그의 시복에 대한 절차가 시작되었고,
1983년 6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그의 시복식이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거행되었다.
그 후 1991년 11월 17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보편교회 모든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다.

 

 

 

 

     ▶나르세스(대)(11.19)
 
성인명 나르세스(대)(Narses the Great)
축일 11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아르메니아(Armenia)
활동연도 +373년
같은이름 나르사, 나르쎄스, 네르사, 네르세스, 네르쎄스

 

아르메니아의 성 대 나르세스(Narses the Great)


   네르세스(Nerses)로도 불리는 성 대 나르세스는
성 대 이사악(Isaac, 9월 9일)의 아버지로 카파도키아(Cappadocia)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태어났다.
왕가의 후손인 그는 어느 공주와 결혼하였지만,
그 얼마 뒤에 아내와 사별함으로써 궁중 관리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그 후 사제로 서품되었고, 353년에는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아르메니아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카이사레아에 있을 동안에 배운 원칙에 따라 교구의 개혁을 착수하고,
365년에는 제1차 전국 시노드(Synod)를 소집했고,
병원을 개설하는 한편 수도원들을 크게 격려하였다.
한편 국왕이 왕비를 살해한 사건을 성 대 나르세스가 문제를 삼은 것이
원인이 되어 그는 에데사(Edessa)로 추방되었으며,
왕이 전투에서 죽은 뒤에야 귀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로 선임된 팝(Pap)이란 사람이 그를 독살하였다.

 

 

 

    ▶오바드야(11.19)
 
성인명 오바드야(Obadiah)
축일 11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아브디아스, 오바디아스, 오바디야

 


   성 오바드야(Abdias, 오바디야)는 구약성서 12 소예언서의 하나인
오바드야서에 등장하는 예언자이다.
‘야훼를 섬기는 이’ 또는 ‘야훼의 종’을 뜻하는 오바드야는 히브리어에서
흔한 이름으로, 구약성서에서는 다윗 시대부터 유배 이후 시대까지
여러 사람이 이 이름으로 불린다.
 
바빌론 탈무드에서는, 북왕국 아합 시대에 궁내 대신으로 있으면서,
이세벨 왕비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학살할 때에 백 명을 구해 준
오바드야를(1열왕 18,3-4) 이 예언자로 지목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소예언서를 열둘로 고정시키려고 말라키(Malachias)서처럼 주인 없이
전해지는 예언을 오바드야라는 이름으로 묶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러할 개연성도 별로 크지 않다.

   성 오바드야는 실제 예언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는 성전에서 봉직하던 전례 예언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아마도 대환난이 일어난 뒤, 폐허로 변해 버린 성전에서 참회와 탄원의 전례가
거행될 때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 예언서에 수록된 신탁을 선포하였을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짧은 21절로 된 오바드야서에서 예언자 오바드야는
억압자 앞에서 가난하고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연대할
필요가 있다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나라가 바빌론에게 약탈을 당하고 망해가고 있다. 이때 오바드야가 나서서
형제 나라 에돔(창세 25,19-28; 36,1 참조)이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대신 부자들을 편들었다고 비난한다.
에돔은 사태를 즐기고 있었다.
땅을 정복하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약탈과 박해와 살인에 동참하고 있었다.
선택받은 사람들과 보호를 청하는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못된 짓을 복수심으로 행하고 있었다.
과거의 불목을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2열왕 8,20-22 참조).
에제키엘 예언자가 말하는 것처럼, 에돔은 ‘영원한 미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에제 35,5).

   그 외에도 에돔인은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다.
자기네를 이길 자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3절).
자기네 지혜와 자기네 전사들의 용맹성을 내세우면서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오바드야 예언자는 동맹국들이 보호를 받지 못하고 공격을 당하는
형제 나라 에돔에게 등을 돌릴 때(5-9절), 그 지혜가 무지로,
그 용맹성이 비겁함으로 변하리라고 말한다.
 
오바드야는 유대 왕국도 무죄하지 않고 그래서 그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겪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역사상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형제국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에돔에게
큰 잘못이 있음을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