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0월11일 聖女마리아 솔레다드님..등
H-Simon
2010. 10. 10. 17:40
성녀 마리아 솔레다드 토레스 아코스타(Maria Soledad Torres Acosta)는
세례 때에 엠마누엘라(Emmanuela)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녀는 조용한 성품의 소녀로 자랐으며 놀이보다는 기도하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던 그녀가 미카엘 마르티네스 이 산즈(Michael Martinez y Sanz)라는
성모의 종 3회원 신부를 만나게 됨으로써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수많은 병자와 버려진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인물이었다.
1851년 미카엘 마르티네스 이 산즈 신부는 7명의 부인들을 모았는데,
그들 가운데 맨 마지막 인물이 바로 엠마누엘라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는 이 수녀회의 실질적인 설립자가 되어
'고통의 성모님'의 가호 아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1861년 '마리아 시녀회'는 겨우 교구 차원의 승인을 얻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였다.
1875년에는 산티아고데쿠바(Santiago de Cuba)에 첫 번째
해외 수녀원을 건립하였다.
성녀 마리아 솔레다드는 35년 동안 이 수녀회의 지도자로서 봉사하였다.
그녀는 1950년 시복되었고,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
리에르의 성 굼마로(Gummarus) |
성 굼바루스(굼마로)는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 지방 리에르의
영주 아들이었으나,
읽고 쓰는 법도 배우지 못하고 자라나 피핀 왕의 궁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심은 뛰어나서 모든 일에 충실함은 물론
자선활동에 전념하였다.
왕은 그를 귀히 여기고 높은 지위에 올리고, 귀니마리아(Gwinmarie)라는 여인과
성대한 결혼식을 베풀어 주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깡마르고 성격이 잔인하였으므로 그는 아내의
모든 행위를 단련의 기회로 여기고 일생을 같이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아내를 통하여 높은 성덕을 닦았던 것이다. |

파비아의 성 알렉산데르 사울리(Alexander Sauli) |
제노에제(Genoese) 가문의 아들로 이탈리아 밀라노(Milano) 태생인
성 알렉산데르 사울리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후에
17세의 나이로 바르나바회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파비아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면서
자비로 도서관을 지어 헌납하기도 하였다.
1556년 그는 같은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으며
또 뛰어난 설교가로서 높은 존경을 받았다.
이를 지켜보던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는
그를 초빙하여 밀라노 대성당에서 설교하게 했는데,
너무나 청중들을 열광시켰기 때문에 스폰드라티(Sfondrati) 추기경
(나중에 그레고리우스 14세 교황이 됨)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567년 그는 약관 33세의 나이로 총장이 되었고,
1570년에는 코르시카 알레리아 주교로 활약하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교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였기에
'코르시카(Corsica)의 사도'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1741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04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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