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0월6일 聖女마리아 프란치스카,聖브루노님..등
H-Simon
2010. 10. 5. 16:06
10월6일(수) 聖女마리아 프란치스카,聖브루노님..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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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프란치스카(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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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Maria Francisca) |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는 안나 마리아 로사 니콜레트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16세 때에 부친이 어느 집안의 자제와 혼인하도록
강요하였으나 자신은 이미 하느님만 사랑하기로 결심한 후였다.
그러므로 그의 부친은 그녀를 방안에 가두고 빵과 물만 주는 등 갖은 학대를
하였으나 그녀는 이것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한 단계로 받아들이고
인내하였고, 어머니가 그녀를 설득하려 하자 자신은 작은 형제회 3회 회원이
되겠다는 뜻만 밝혔다.
이리하여 그녀는 1731년 9월 8일에 작은 형제회 3회 회원이 되었는데, 그녀의 주요 신심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그 후 38년 동안이나 교구사제인 요한 페시리의 사제관에서
일하였다.
마리아는 신비스런 현상들이 몸에서 일어남을 감지하기 시작했는데,
십자가의 길이나 사순절의 금요일이 되면 예수 수난에 버금가는
고통을 앓기 시작하였으니 게세마니동산의 번뇌, 매 맞음, 가시관을 쓰심,
모욕, 침 뱉음, 죽음에 이르는 고통 등이었다.
사실 그녀는 오상 성흔을 이미 받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그녀에게는 신체적인 고통이 따랐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자발적인 고행까지 행하였다.
한번은 연옥 영혼들의 고통을 체험하였다.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는 프랑스 혁명 초기까지 살았다.
그녀는 이 혁명의 무서움을 미리 예언하였다.
성녀의 유해는 나폴리의 산타 루치아 델 몬테 성당에 묻혔다.
그녀는 184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
▶브루노(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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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모네 바릴라리의 성 브루노(Bruno) |
성 브루노는 독일 쾰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좋은 교육을 받은 것 외에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지만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쾰른의 성 쿠니베르투스 학교를 거쳐 프랑스의 랭스주교좌성당 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1055년경에 쾰른으로 되돌아 와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다시 1056년에 랭스로 가서 신학교수가 되었다.
다음 해에 그는 그 학교의 학장이 되어 1074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때 그는 성직매매로 랭스의 주교좌를 획득했던 자신의 대주교 마나세를 탄핵하는 일에 앞장섰다.
성 브루노는 그를 고발하고 그의 직책에서 사임을 요청하여
이를 성취하였으며, 이를 눈여겨 본 랭스의 교구민들이
그를 대주교로 원하였으나 그는 은수생활을 결심하였다.
그는 1082년 마침내 2명의 동료와 함께 랭스를 떠나 몰렘의 성 로베르투스(4월 29일)의 지도하에 은수자가 되었지만,
1084년에 그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그르노블로 이주하여 적막한 알프스
산 속에 은수처를 마련하였다.
그르노블의 주교인 샤토뇌프의 성 후고는 샤르트뢰즈라는 장소를
브루노에게 제공해주었다.
이곳에 브루노와 동료들은 경당과 개인 방을 만들고
성 베네딕투스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며 생활하였다.
이것이 곧 카르투지오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극도의 가난생활을 하기 위하여
노동하고 기도하며 성서를 베끼는 작업을 하였으나,
그들의 규칙을 글로 쓰지는 않았다.
1090년 브루노는 옛 제자였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7월 29일)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갔다.
교황의 명에 순명하여 은수처를 떠난 브루노는 이후 교황의 고문으로서
성직자들의 개혁 등 교회의 여러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협력하였다.
얼마 후 브루노는 교황을 설득하여 다시 은수생활로 돌아가게 되었다.
로마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에 정착한 브루노는
샤르트뢰즈에서와 같은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들의 생활에 감명을 받은
시칠리아 섬의 영주 로제 백작으로부터 라 토레의 땅을 기증받아
이곳에 '라 토레의 성 마리아'라는 은수처를 설립하고 운명할 때까지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는 시편과 성 바오로의 편지들에 대한 주석을 썼다.
공적인 명예를 거부하는 카르투지오회의 규칙에 따라 공식적으로 시성식을 거행하지 않았고, 다만 레오 10세 교황이 1514년 그를 구두로
시성하여 카르투지오회 내에서 브루노에 대한 공경 예절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162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 축일이 10월 6일로 정해졌으며,
1674년에 교황 클레멘스 10세는 모든 교회가 브루노의 축일을 지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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