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8월19일 聖요한 에우데스, 聖루도비코님..등

H-Simon 2010. 8. 18. 18:16

 

 
8월19일(목)
聖요한 에우데스, 聖루도비코님..등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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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에우데스(8.19)
 
성인명 요한 에우데스(John Eudes)
축일 8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설교가
활동지역  
활동연도 1601-1680년
같은이름 에우데스,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성 요한 에우데스는 1601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아르장탕 근교
리(Ri)라는 마을의 유복한 가정에서 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되던 해에 캉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결혼하기를 바라는 양친의 소망을 뿌리치고 1623년에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였다.
 
 
파리와 오벨빌리엘에서 수학한 그는 1625년 12월 20일에 사제로 서품을
받은 뒤 노르망디 지역에서 본당 사목에 전념하였다.
1625년과 1631년에 노르망디 지역을 급습한 전염병의 희생자를
돌보기 위해 활약하기도 했던 그는 이 시기에 설교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또한 얀센주의의 강력한 반대자로서의 명성도 획득하였다.
그밖에도 고해성사 등의 성무 활동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신자들과
교류하였다.

   오라토리오 회원으로서 사목활동에 종사하던 요한은 당시에
나타난 교회의 악한 표양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점차 성직자 교육을 등한시하던 오라토리오회의 활동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으며, 만약 각 성당의 사제가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본당 사목 활동은 단지 일시적인 성공만을 할 수 있을
뿐이라며 성직자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타락한 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목에도 흥미를 보여,
1641년 평신도였던 장 드 베르니에르와 가스통 드 렌티와 함께
성체회, 성모 방문 수녀회의 도움을 받아 캉에
‘회개한 죄인들을 위한 보호소’를 세웠다.

   요한은 1643년에 오라토리오회를 떠나 캉에서
새로운 사제회를 설립하였다.
그가 창립한 사제회는 재속 사제회로서 교구 신학교에서
성직자 양성과 본당 선교 활동을 통해 신자들에 대한 사목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오라토리오회 총장과의 불화 등의 이유로 그의 새로운
사제회는 오라토리오회와 얀센주의자들로부터 큰 도전을 받아
교황청의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1650년 쿠탕스의 주교가 교구 내에 신학교를 설립해 달라고
요청하여 활기를 띤 이 사제회는 1851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예수 마리아 수도회’로 공식 명칭을 정하였으며
‘에우데스회’로도 불린다.
또 같은 해 2월 8일 교구 주교로부터 캉에 개설한 보호소를 새로 구성해
‘착한 목자회’로 승인을 받았으며,
1666년에 공식적인 수녀회로서 교황의 인가를 받았다.
이 수녀회는 주로 ‘타락한 여성들’을 위한 구제 활동을 전개하였다.
요한은 1653년에 리지외에, 1659년에는 루앙에, 1666년에 에브뢰에,
1670년에는 렌에 신학교를 세웠다.

   오늘날 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예수 성심의 환시를
체험하고 그 신심을 전파시킨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10월 16일)처럼 예수 성심의 신심을 전파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는 후에 예수 성심의 공경과 신심이 전파되고 축일이
제정되도록 하는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성모 성심 공경의 보편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성 요한 에우데스는 1909년에 시복되었으며,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루도비코(8.19)
 
성인명 루도비코(Louis)
축일 8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툴루즈(Toulouse)
활동연도 1274-1297년
같은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좌~ 성 요한 복음사가, 성 필립보 베니시오, 성 야고보, 성 미카엘, 성 루도비코


   성 루도비쿠스는 시칠리아 섬의 왕 카롤루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84년 그의 부친이 아라곤 왕과의 해전에서 포로가 되었을 때,
석방 조건으로 그의 아들 세 명을 보내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져
성 루도비쿠스도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7년 동안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에서 지내면서 여러 가지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하는 한편,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영향을
받아가며 공부하였다.
이윽고 그는 작은 형제회 회원과 함께 기거하면서
밤낮으로 기도하고, 철학과 신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1295년 그는 석방되었으나 아라곤 국왕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를 따르기 위해 세속적인
모든 것을 물리치고는
“나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 후 그가 툴루즈의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로부터 관면을 받고 23세의 나이로
사제 서품 후 착좌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로마로 가서 작은 형제회 회원으로서 서원하였다.
그는 가난한 수도자로서 주교직을 수행하였으나,
툴루즈 사람들은 그를 왕 못지않게 공경하였다.
그의 신심과 자태는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주교관의 모든 화려한 물건은 배격하고,
작은 형제회의 회원답게 오로지 작은 형제회 회원에 알맞은
의복과 음식으로 만족하며 살았다.
그는 마르세유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 안장되어 있다.
1317년 요한 22세로부터 시성될 때 그의 모친도 생존해 있었다.
  
 
 
 
 
 
    ▶에제키엘 모레노 이 디아스(8.19)
 
성인명 에제키엘 모레노 이 디아스(Ezekiel Moreno y Diaz)
축일 8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도미니카(Dominicana)
활동연도 1848-1906년
같은이름  

 


   성 에제키엘 모레노 이 디아스는 1848년 4월 9일 에스파냐
타라조나 지방의 알파로에서 태어나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1864년 9월 21일 나바라의 몬테귀도에서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였고, 후에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1871년 6월 3일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다.
1893년 10월 23일 교황대리이자 콜롬비아 피나라의 주교가 된 그는
같은 해 12월 2일에 콜롬비아 파스토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교구 신자들에게 관대한 애덕을 베푼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6년 8월 19일 사망한 그는 1975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2년 10월 11일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인
산토도밍고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