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8월 2일 聖베드로 예마르, 聖스테파노1세님..등

H-Simon 2010. 8. 2. 08:53

 

8월 2일(화)
聖베드로 예마르, 聖스테파노1세님..등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Peter Julian Eym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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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8.2)
 
성인명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Peter Julian Eymard)
축일 8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811-1868년
같은이름 베드루스, 에마르, 율리아노, 율리아누스, 줄리앙,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 베드로 율리아누스 예마르는 프랑스
그르노블의 라 뮈르 디제르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칼 장수였으므로 18세 때까지 부친의 일을 거들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이 있으면 라틴어를 배웠기에 1831년에
그르노블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34년 7월 20일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동안 샤트와 몽테나르 본당 사목자로
일하던 중 마리스타가 되기 위하여 주교의 허락을 청하였다.
1839년 ‘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마리스타 교육 수사회) 에 입회하여 수련을 받은 후
그는 벨리 소신학교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1845년에는 리옹(Lyon) 수도원의 관구장이 되었다.

   한번은 그가 주님의 성체 축일에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나의 영혼은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나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그분의 현존을 전하겠습니다.
” 1851년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신부는 노트르담 드 푸르비에르를
순례한 후 ‘성체 사제회’ 설립을 구체화시켰다.
 
1856년 마리스타 총장의 승인을 받은 그는 12일 동안이나
파리(Paris)의 대주교를 설득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래서 1857년 1월 6일 이 위대한 수도회가 빛을 보게 되었다.
 
1858년 ‘성체 시녀회’를 설립하였고, 1895년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8월 4일) 신부도 그를 일컬어 ‘성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참으로 위대한 성인이었다.
그는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62년 12월 9일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스테파노 1세(8.2)
 
성인명 스테파노 1세(Stephen I)
축일 8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교황
활동지역  
활동연도 +257년
같은이름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좌~ 성 대 야고보, 성 요한 세례자, 성모자,

교황 성 스테파노 1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이탈리아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스테파누스는
로마의 주교가 된 후, 교황 성 루키우스(Lucius, 3월 4일)를 계승하여
254년 5월 12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당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이단자들이 집전한 세례를 무효하기에
가톨릭 교회로 돌아올 경우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단자들이 베푼 세례도 그 유효성은 성사의 제정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인하기에 유효하다고 선언하여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교황이었다.
그는 순교하였다고 전해 내려오지만,
실제로는 순교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에우세비오(8.2)
 
성인명 에우세비오(Eusebius)
축일 8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베르첼리(Vercelli)
활동연도 +371년
같은이름 에우세비오스, 에우세비우스

 

베르첼리의 성 에우세비오(Eusebius)


   성 에우세비우스(에우세비오)는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 태생으로
어느 순교자의 후손으로어렵게 자랐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이사하였기 때문에
성 에우세비우스는 로마에서성장하고 공부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베르첼리의 초대주교로 선출되어그곳에 착좌하였다.
그는 교구내의 성직자 개혁운동을 전개했고, 성직생활과
수도생활의 일치를시도했던
서방 교회의 첫 번째 주교로 손꼽힌다.
그는 일단의 성직자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그는 정통 교회를 고수하는 강력한 주교였다.
아리우스파에 대한 그의 강력한 반대 입장 때문에 그는 많은 곤욕을
치렀는데, 355년 밀라노회의에서 성 아타나시우스(5월 2일)를 단죄하는
결의를 반대한 결과로 인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추방당하였다.
그래서 그는 6년 동안 팔레스티나의 스키토폴리스에서유배생활을 하였다.
너무나 심한 모욕과 고통을 당하였기에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4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다음에는 카파도키아로 또 그 다음에는 이집트의 테베,
오늘날의 룩소르로 유배를 갔다.

   361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고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에 유배된 주교는 각자의교구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에 따라 귀향하였고,
362년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참석할 수 있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안티오키아로 파견되는 사절로 뽑혔는데,
그의 임무는 331년에 아리우스파에 의하여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출된
멜레티우스 추종자들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세월만 허송하였다.
그 후 그는 일리리쿰 지방을 다니며 정통 교회를 옹호하고 아리우스파를
배격하는 운동을 꾸준히전개하였고, 363년에 베르첼리로 돌아왔다.
그는 여생을 성 힐라리우스(Hilarius, 1월 13일)와 함께 아리우스파와
싸우는데 보냈다. 
                             
   베르첼리에는 라틴어로 된 복음서 사본이 보물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 사본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의 불가타 사본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선 것이라 한다.
학자들은 성 에우세비우스의 손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본을 “베르첼리의 사본”(Codex Vercellensis)라고 한다.
그는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의 저자 중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