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7월 17일 聖 알렉시오 님..등

H-Simon 2010. 7. 16. 08:36

 

 

7월 17일(토) 

 聖 알렉시오 님..등
 
 로마의 성 알렉시오(Alexius)

 

16.jpg
                                                      
 
 
 
    ▶알렉시오(7.17)
 
성인명 알렉시오(Alexis)
축일 7월 1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증거자
활동지역 로마(Roma)
활동연도 +417년?
같은이름 알렉시스, 알렉시우스, 알렉씨오, 알렉씨우스

 

로마의 성 알렉시오(Alexius)


   성 알렉시우스를 ‘하느님의 사람’으로만 언급한 작자 미상인
한 전기에서 그는 어느 부유한 로마 원로원의 아들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그의 애덕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과
어느 부유한 로마 여인과 결혼하여 부모를 기쁘게 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결혼식 날에 서로 동의하여
헤어져 그는 시리아로 가서 17년을 살았다.  
           
   성 알렉시우스는 에데사의 어느 성당에 기거하면서
놀라운 청빈의 덕을 실천하면서 성덕을 닦았다고 한다.
자신이 기거하는 성당의 마리아상이 자신을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에데사의 주민들에게 알렸을 때 그는 로마로 돌아 왔다.
러나 그의 부친이 구걸하는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의 부친은 자기 자식인 줄 모르고 그에게 일거리를 주고
자기 집 계단 밑에 기거하게 했다.
만인들로부터 잊혀진 인물로서 그는 로마에서 17년을 살았다.

   그의 신원이 밝혀진 때는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자서전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이이야기는 서방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학자들은 성 알렉시우스가 확실히 생존했으며 에데사에 묻혔다고 믿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7월 17일을 성인의 축일로 지내며,
동방 교회에서는  3월 17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다.
 
지금도 로마의 성 알렉시우스와 보니파티우스 성당에는 성인이 살았던
아버지의 집 계단이라고 하는 기념물이 보존되어 있다.
 
 
  ▶나르잘레(7.17)
 
성인명 나르잘레(Narzales)
축일 7월 1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튀니지(Tunisia)
활동연도 +180년
같은이름 나르잘레스
 
   성 스페라투스와 그 동료 순교자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었으나,
실제로는 그의 아들 코모두스 황제의 명에 따라 순교하였다.
 
이 순교자들은 쉴리움, 곧 오늘날 북 아프리카의 튀니지 출신으로
성스페라투스,
성 나르잘레,
키티누스,
베투리우스,
펠릭스,
아킬리누스,
레탄티우스 등 남자가 7명이고,
 
성녀 야누아리아,
제네로,
베스티나,
도나타,
세쿤다 등 여자가 5명이었다.
 
그들은 카르타고의 감옥으로 끌려가서 집정관 사투르니누스의
이교 신상에 대한 희생 제의를 끝내 거부하고 순교하였다.
이때 함께 순교한 스페라투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하느님, 감사합니다.”였다.
 
 
   ▶엔노디오(7.17)
 
성인명 엔노디오(Ennodius)
축일 7월 1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파비아(Pavia)
활동연도 +521년
같은이름 엔노디우스
 
   성 마뉴스 펠릭스 엔노디우스는 프랑스 지방에 정착한
이름 있는 가문 태생이다.
그의 출생지는 프랑스 아를(Arles)인 듯하나 유아기를
이탈리아에서 보냈고 밀라노에서 교육받았다.
그리고 자신을 교육시킨 삼촌이 운명한 후에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젊은 아내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아내 역시
수녀가 되겠다고 순순히 승낙하였다.

   엔노디우스는 이미 뛰어난 수사학자였다.
그는 파비아의 주교인 성 에피파니우스로부터 부제품을 받은 뒤에
성서를 공부하였고 또 같은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그는 라우렌티우스를 주축으로 하는 이단을 물리치기 위한
시노드와 교황 성 심마쿠스를 위하여 호교론을 저술하여
교회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496년에 서거한 파비아의 성 에피파니우스 전기,
레렝스의 성 안토니우스 전기를 썼다.
엔노디우스는 고대 수사학파의 마지막 대표자였다.

   성인은 514년경에 파비아의 주교로 승품되었는데,
성 에피파니우스를 능가하는 신심과 권위로 교구를 다스렸고,
교황 성 호르미스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어
그리스도 단성설을 주장하는 이들과의 화해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 임무는 성공적이라고 평가받지는 못하였다.

   그 후 그는 순회 설교를 하면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고,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였으며,
교회를 짓거나 교회를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성모 마리아, 성 암브로시우스, 성 에우페미아 등을 주제로 하는
아름다운 시를 발표하는 재질을 보였다.
그의 시는 대체적으로 신비적인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또한 그는 파스카 초 축성 때 부르는 새로운 찬미가를 두 편이나 썼다.
그는 불과 48세에 운명하였으나 교회에 남긴 업적은 지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