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7월 15일 聖보나벤뚜라,聖女안나 마리아 님..

H-Simon 2010. 7. 14. 08:35

 

 

7월 15일(목) 

 聖보나벤뚜라,聖女안나 마리아 님..
 
 

프란치스코 데 수르바란의 기도 중인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16.jpg
 
 
  ▶보나벤투라(7.15)
 
성인명 보나벤투라(Bonaventure)
축일 7월 1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추기경, 신학자, 교회학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217?-1274년
같은이름 보나벤뚜라, 보나벤처

 


   조반니 디 피단차라는 이름의 성 보나벤투라는
아버지 조반니 디 피단차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로(리텔라)
아들로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불확실한 전설이긴 하지만 보나벤투라는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이름이라 한다.
그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그가 어렸을 때 중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 중재 기도를 바쳐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는 1238년에 작은 형제회 수도자가 되어 영국의 유명한 헤일스의
알렉산데르 문하에서 공부하려고 파리(Paris)로 갔으며,
그로부터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다.
그는 1248-1255년까지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과 성서를 가르쳤는데,
그의 강의는 새로운 탁발 수도자를 반대하던 교수들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생 아무르의 빌리암을 비롯한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 논쟁에 뛰어들어서,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남겼다.
마침내 1256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생-아무르를 단죄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켰다.
탁발 수도회가 파리에서 다시 부흥될 때
그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1월 28일)와 함께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와 비슷한 초창기에 성 보나벤투라는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피선되었고,
수도회의 내부 분쟁자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하였으며,
온건한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극단주의 그룹을 단죄하였다.
1260년 나르본에서 열린 수도회의 총회에서 그는 오랫동안 수도회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는 회칙에 대한 회헌을 선포하였다.
그는 1265년 요크의 대주교좌를 거절하였고,
1271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의 선출을 적극 지지하였다.
1273년 그는 알바노의 교구장 추기경이 되었으며,
다음 해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로마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토의하려는
리옹 공의회의 의사일정을 짜도록 그를 위촉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기 중인 7월 15일에
리옹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보나벤투라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 중의 한 분이다.
‘세라핌 박사’로 알려진 그는 수많은 글을 썼고 또 남겼는데,
“베드로 롬바르드의 금언에 대한 주석”,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 “세 갈래 길”, “완덕 생활” 등의 영성 서적을
비롯하여 성서 주석, 약 5백 편의 설교 등이 유명하다.
 
그는 1482년 4월 14일 교황 식스투스 4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588년 교황 식스투스 5세로부터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성체와 성합 그리고 추기경 모자가 그의 상징이다.
 
 
   다윗(7.15)
 
성인명 다윗(David)
축일 7월 1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스웨덴(Sweden)
활동연도 +1080년
같은이름 다비드, 데이비드

 


   성 다윗은 잉글랜드 수도자인데, 평소에 순교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사람이다.
 
스웨덴의 성 지그프리드(2월 15일)의 세 조카들이
이방인들의 손에 죽었다는 식을 듣고,
스웨덴으로 가는 선교단의 일원으로 자원하여 북유럽의 사도로 불리는
성 안스카리우스( 2월 3일)의 유업을 계승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박시오의 주교로 있던 성 지그프리드에게 갔고,
그에 의해서 베스트만란드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백성들의 회개를 위하여 큰 공적을 쌓았고,
또 후에 문크토르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는 전심전력으로 선교활동에 임하였으며,
기적을 행하는 은총을 받았고,
고귀한 눈물을 흘리는 은혜 또한 받았으나,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순교의 은혜는 받지 못하였다.
그 대신 그는 연만한 나이가 되도록 수를 누리다가 평화로이 숨을 거두었고,
그의 높은 성덕은 날로 퍼져나갔다.
성 다윗은 흔히 바스테라스의 초대 주교로 일컬어지며,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공경을 받는 성인이다.
 
 
   ▶안나 마리아 자부에이(7.15)
 
성인명 안나 마리아 자부에이(Anne Mary Javouhey)
축일 7월 15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779-1851년
같은이름 낸시, 니나, 마리아, 메리, 미리암, 애나, 애니, 앤, 자부에이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의 잘랑주에서 태어난 안나 마리아 자부에이는
부유한 농사꾼의 딸로 어릴 때에는 억센 기질과 용기가 굳센 아이였다.
장성한 뒤에 그녀는 수도성소를 느끼고 브장송에 있는 자비회에 들어갔으나,
자신의 성소를 찾지 못하여 다시 스위스 발-생트에 있는 시토 수녀원으로 갔다.

   그곳의 지도신부인 아우구스티누스 레스트랑주는 그녀에게
새 수도원을 설립하는 성소가 있다고 일러주었다.
그녀는 브장송에 있을 때 환시를 보았는데,
소년 소녀들이 가득 찬 방을 보고 있던 중
"이들이 곧 하느님께서 너에게 맡길 아이들이다." 하는
신비스런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로 돌아온 그녀는 샹블랑에 최초의 학교를 개교함으로써
'클뤼니의 성 요셉 수녀회'가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 후 그녀의 수녀회는 과달루페, 마르티니크, 생피에르, 퐁디셰리 등지에
수도원을 세워 학교와 병원 일을 하였고,
 마침내는 기아나의 가이엔느와 뉴 앙굴렘으로 진출하였다.
 
성녀 안나는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위인'이란 칭호를 받았다.
1843년 64세가 된 그녀는 기아나를 떠났고, 자신이 세운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는 일로 지내다가 선종하였다.
그녀의 수녀회는 주로 신세계로 진출하였다.
 
 
    La Golondrina (제비) - Caterina Valen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