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7월 8일 교황 福者에우제니오3세.. 등

H-Simon 2010. 7. 7. 17:54

 

7월 8일(목)

교황 福者에우제니오3세.. 
 

교황 복자 에우제니오 3세(Eugenius III)

 

16.jpg
   
 
 
 ▶에우제니오 3세(7.8)
 
성인명 에우제니오 3세(Eugene III)
축일 7월 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교황
활동지역  
활동연도 +1153년
같은이름 에우게니오, 에우게니우스, 에우제니우스, 유진
 

교황 복자 에우제니오 3세(Eugenius III)


   이탈리아 피사(Pisa) 근교인 몬테마뇨에서 태어난
성 에우게니우스의 본명은 피에트로 파가넬리인데,
그가 피사 대성당의 성직자가 된 후 성 베르나르두스를 만남으로써
1135년에 클레르보에서 시토회원이 되었다.
 
그 후 로마의 성 아나스타시우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다가 전혀
예상하지 않던 교황으로 선출되자 이름을 에우게니우스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선출을 반대하던 브레시아의 아놀드의 농간과
로마 원로원의 통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는 로마를 탈출해야만 하였다.

   그는 1145년 2월 18일 파르마 수도원에서 비밀리에 축성식을 가졌다.
그 후 몇 가지 조약을 체결한 뒤에 로마로 돌아가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초청으로 그는 1147년에 그곳을 방문하였고
제2차 십자군 운동을 선포하였다.
비록 이 십자군은 성 베르나르두스의 노력이 지대하였지만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두스 2세군의 패퇴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났다.
에우게니우스는 1147년에 파리와 트리어에서 시노드를 개최하고,
다음 해에는 랭스에서 시노드를 열어 아놀드를 단죄하였다.

   세상이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았을 때 그는 로마로 귀향하였으나,
1150년에 재차 강제로 로마를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티볼리에 거주하였고,
1153년 프레데릭 황제와 콘스탄츠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교회의 권리를 보증하는데 유익한 협약이었으나,
그는 그해 7월 8일에 그곳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그는 소란스런 재임 기간을 통하여 몇 가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동방 교회와 로마와의 일치를 시도하였고,
성직자의 규율을 재정비하였으며,
명예스럽지 못한 성직자들을 제거하였고, 마니교의 재건을 봉쇄하였다.
그는 실로 용기가 많았고 단순하였으며 항상 성 베르나르두스의
영적 권고를 따라 생활하여 덕이 출중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72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하드리아노 포테스큐(7.8)
 
성인명 하드리아노 포테스큐(Hadrian Fortescue)
축일 7월 8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476-1539년
같은이름 아드리아노, 아드리아누스, 아드리안, 포떼스큐,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안
 

   영국 잉글랜드의 펀스본에서 태어난 하드리아누스 포테스큐는
잉글랜드 데번셔 가문 출신으로 앤불린과는 사촌간이다.
그는 두 번이나 결혼하였는데, 첫 번째는 앤 스토놀과 결혼하였으나
12년 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앤 레드와 재혼하였다.
그는 전처에게서 두 딸을, 후처에게서 세 아들을 두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도미니코회 3회원이 되었고,
궁중 집회에 참석할 수 있는 바스의 기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두 차례나 프랑스와의 전투에 참가했고,
캐서린 왕비가 칼레스로 여행할 때에는 수행원으로 그리고
앤불린의 대관식에는 귀빈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신심이 굳었던 그는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을 반박하다가
다음 해 봄에 체포되어 1539년 2월 런던탑에 갇혔다.
그는 끝까지 국왕의 수장령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는 런던의 타워 힐에서 토마스 딘글리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1895년 5월 13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7월 8일(목)

교황 福者에우제니오3세.. 
 

교황 복자 에우제니오 3세(Eugenius III)

 

16.jpg
   
 
 
 ▶에우제니오 3세(7.8)
 
성인명 에우제니오 3세(Eugene III)
축일 7월 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교황
활동지역  
활동연도 +1153년
같은이름 에우게니오, 에우게니우스, 에우제니우스, 유진
 

교황 복자 에우제니오 3세(Eugenius III)


   이탈리아 피사(Pisa) 근교인 몬테마뇨에서 태어난
성 에우게니우스의 본명은 피에트로 파가넬리인데,
그가 피사 대성당의 성직자가 된 후 성 베르나르두스를 만남으로써
1135년에 클레르보에서 시토회원이 되었다.
 
그 후 로마의 성 아나스타시우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다가 전혀
예상하지 않던 교황으로 선출되자 이름을 에우게니우스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선출을 반대하던 브레시아의 아놀드의 농간과
로마 원로원의 통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는 로마를 탈출해야만 하였다.

   그는 1145년 2월 18일 파르마 수도원에서 비밀리에 축성식을 가졌다.
그 후 몇 가지 조약을 체결한 뒤에 로마로 돌아가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초청으로 그는 1147년에 그곳을 방문하였고
제2차 십자군 운동을 선포하였다.
비록 이 십자군은 성 베르나르두스의 노력이 지대하였지만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두스 2세군의 패퇴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났다.
에우게니우스는 1147년에 파리와 트리어에서 시노드를 개최하고,
다음 해에는 랭스에서 시노드를 열어 아놀드를 단죄하였다.

   세상이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았을 때 그는 로마로 귀향하였으나,
1150년에 재차 강제로 로마를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티볼리에 거주하였고,
1153년 프레데릭 황제와 콘스탄츠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교회의 권리를 보증하는데 유익한 협약이었으나,
그는 그해 7월 8일에 그곳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그는 소란스런 재임 기간을 통하여 몇 가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동방 교회와 로마와의 일치를 시도하였고,
성직자의 규율을 재정비하였으며,
명예스럽지 못한 성직자들을 제거하였고, 마니교의 재건을 봉쇄하였다.
그는 실로 용기가 많았고 단순하였으며 항상 성 베르나르두스의
영적 권고를 따라 생활하여 덕이 출중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72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하드리아노 포테스큐(7.8)
 
성인명 하드리아노 포테스큐(Hadrian Fortescue)
축일 7월 8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476-1539년
같은이름 아드리아노, 아드리아누스, 아드리안, 포떼스큐,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안
 

   영국 잉글랜드의 펀스본에서 태어난 하드리아누스 포테스큐는
잉글랜드 데번셔 가문 출신으로 앤불린과는 사촌간이다.
그는 두 번이나 결혼하였는데, 첫 번째는 앤 스토놀과 결혼하였으나
12년 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앤 레드와 재혼하였다.
그는 전처에게서 두 딸을, 후처에게서 세 아들을 두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도미니코회 3회원이 되었고,
궁중 집회에 참석할 수 있는 바스의 기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두 차례나 프랑스와의 전투에 참가했고,
캐서린 왕비가 칼레스로 여행할 때에는 수행원으로 그리고
앤불린의 대관식에는 귀빈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신심이 굳었던 그는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을 반박하다가
다음 해 봄에 체포되어 1539년 2월 런던탑에 갇혔다.
그는 끝까지 국왕의 수장령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는 런던의 타워 힐에서 토마스 딘글리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1895년 5월 13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