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6월 21일 聖알로이시오 곤자가, 聖女데메트리아님..

H-Simon 2010. 6. 20. 18:52

 

 

6월 21일(월)

聖알로이시오 곤자가, 聖女데메트리아님..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Aloysius Gonzaga)

 

16.jpg
            

                                           Dan Schutte,S.J 곡 /  씨튼 수녀회 기념음반 수록곡

 
 
   ▶알로이시오 곤자가(6.21)
 
 
성인명 알로이시오 곤자가(Aloysius Gonzaga)
축일 6월 2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신학생
활동지역  
활동연도 1568-1591년
같은이름 공사가, 알로이시우스

 


   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알로이시오)는 1568년 3월 9일

이탈리아 북부 카스틸리오네의 후작 페란테(Ferrante Gonzaga)

마르타 타나 산테나(Marta Tana Santena)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다소 야만적이고 부도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앙심 깊은 어머니는

깊은 사랑으로 알로이시우스를 키우려고 노력하였다.

알로이시우스의 아버지는 그가 군인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그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가정 교사였던 피에르프란체스코는 알로이시우스의

영혼과 정신을 길러 주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577년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1556-1598)의 부름을 받은 아버지는,

알로이시우스를 피렌체의 대공 프란치스코 데 메디치(Francesco de Medici)

궁의 시동(侍童)으로 보냈다.

2년 후인 1579년에 알로이시우스와 그의 동생 로돌포를

브레시아(Brescia) 지방 만토바(Mantova)로 옮겼다.

1581년 알로이시우스의 가족은 마드리드(Madrid)로 갔고, 알로이시우스는

펠리페 2세 궁정에서 왕자 돈 디에고(Don Diego)의 시동으로 지내면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왕자가 사망하자 1583년 8월 15일 알로이시우스는

예수회에 입회할 것을 결심하였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완강히 반대하며, 일단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원하는 대로 하라고 아들을 설득하였다.

이탈리아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온갖 방법으로 알로이시우스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애를 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1585년 11월 2일 로마에 있는 예수회에 입회한 성 알로이시우스는

밀라노의 예수회 분원에서 몇 달을 지낸 후 만토바에서 수련을 받았다.

이듬해 2월 15일 아버지가 사망하여 잠시 집에 들러 모든 일을

정리하고 돌아온 후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는 나폴리에 머물면서 형이상학을 공부하였고,

로마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다.

1587년 11월 25일 첫 서원을 한 뒤 곧바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를 가르치던 교수들 중에는 당시의 유명한 학자

바스케스(G. Vazquez, 1549-1604)가 있었으며,

훗날 성인이 된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9월 17일)

알로이시우스의 영성지도 신부였다.

   성 알로이시우스가 신학을 공부한 지 4년째 되던

1590년 도시 전체에는 흑사병이 퍼졌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병자들을 돌보던 알로이시우스는 이듬해 3월 초

이 병에 전염되어 6월 21일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성 이냐시오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성 알로이시우스는 시중하고 분별력 있게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하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긍정적이고 관찰력이 탁월하였던 알로이시우스는 철학과 신학의

전 과목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에게도 인정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어려서부터

정결을 지키며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고,

어떠한 반대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특별히 정결에 대한 은사를 받은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또한 그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악습들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자존심과 이기심을 이기기 위한

수련을 끊임없이 하였다.

   성 알로이시우스는 162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26년 12월 31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 후 3년 후 알로이시우스 성인은 젊은이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데메트리아(6.21)
 
 
성인명 데메트리아(Demetria)
축일 6월 21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4세기경
같은이름 데메뜨리아

 


   5세기 때 로마에 성녀 비비아나(Bibiana, 12월 2일)를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고,

그녀의 어머니인 성녀 다프로사(Dafrosa, 1월 4일)에 대한 공경이 보편화되었지만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성녀 비비아나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신앙 때문에 고문을 받고 아콰팡당트로 추방당한 로마의 전 지사인

성 플라비아누스(Flavianus, 12월 22일)의 딸이었다.

성 플라비아누스가 죽은 뒤에 그의 아내 성녀 다프로사도 참수를 당했고,

그들의 딸인 성녀 비비아나와 동생 성녀 데메트리아 역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다시 체포되었다.

성녀 데메트리아는 이때 바로 죽었고,

성녀 비비아나는 후에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라자로(6.21)
 
 
성인명 라자로(Lazarus)
축일 6월 2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약인물
활동지역  
활동연도 +1세기경
같은이름 나자로, 나자루스, 라자루스

 


   성 라자루스(라자로)는 루가 복음 16장 19-31절에 언급된

예수님의 비유 중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중세시대에 널리 알려졌는데,

대개는 라자레토(병원), 라자로네(걸인) 그리고

성 라자로 수도회(나환자를 돌보는 수도회) 등의 명칭이 그에게서 유래한다.

 
 
   ▶메엥(6.21)
 
 
성인명 메엥(Meen)
축일 6월 2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활동지역 브르타뉴(Bretagne)
활동연도 +6세기경?
같은이름 마인, 매앵, 메벤노, 메벤누스, 메앵, 메완

 


   메엥, 마인, 메완 혹은 메벤누스(Mevennus)로 알려진 성 메엥은

각종 피부질환의 치유자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는 주로 성인께 봉헌한 우물이나 개울물로 치유했으나, 특히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의 가엘에 있던 자기 수도원과 이웃한 샘물로 치유하였다.

그 당시에 5천명 이상의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는데,

프랑스 전역을 들끓게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브르타뉴 상부에 있는 체꽃류의 식물들은

성 마인의 풀이라고 부른다.

   그는 원래 남 웨일스(Wales)의 그웬트 태생으로 성 삼손(Samson, 7월 28일)

관련이 있었는데, 어떤 경로를 거쳐 가엘에 수도원을 세웠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대자 가운데 성 아우스텔(Austell)이 있으며,

브르타뉴의 여러 지방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이 많다.

 
 
 
  ▶알바노(6.21)
 
 
성인명 알바노(Alban)
축일 6월 2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마인츠(Mainz)
활동연도 +5세기경
같은이름 알바누스, 알반, 알비노, 알비누스

 


   성 알바누스(알바노)는 그리스인 사제로서 성 우르수스(Ursus)와 함께

그리스 남부 낙소스 섬에서 이탈리아 밀라노로 여행을 하였는데,

이때는 성 암브로시우스가 아리우스파와 격렬한 싸움을 하던 때였다.

암브로시우스는 이 두 사람을 환대하고 정통교회 수호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당부하는 한편,

알프스 건너편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그들은 쾌히 승낙하였으나 성 우르수스는

발레다오스타(Valle d'Aosta)에서 순교하고,

알바누스는 마인츠로 가서 이단들을 상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후눔에서 아리우스파의 자객들에 의해 목이 잘려 숨졌다.

마인츠 시민들은 성 알바누스를 위하여 성당을 세웠고,

그의 유해가 처음 묻혔던 곳의 지명을 알반스베르그로 바꾸기까지 하였다.

그는 알비누스(Albinus) 또는 알반(Alban)으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