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5월 26일 聖女마리아 안나, 聖필립보 네리 님..등

H-Simon 2010. 5. 25. 08:27

 

 

5월 26(수)

聖女마리아 안나, 聖필립보 네리 ..등
 
 
 

 

 

 

키토의 성녀 마리아 안나 아 예수 데 파레데스(Maria Anna a Jesu de Paredes)
16.jpg 
 
 
   ▶마리아 안나(5.26)
 
 
성인명 마리아 안나(Mary Anne)
축일 5월 26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녀, 은수자
활동지역 키토(Quito)
활동연도 1618-1645년
같은이름 낸시, 니나, 마리아나, 마리안나, 메리, 미리암, 애나, 애니,

 


   성녀 마리아 안나 아 예수 데 파레데스는 당시 에콰도르의

수도였던 페루비안 마을에서 태어났고,

마리아 안나 데 파레데스 이 플로레스 즉

‘키토의 꽃’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녀는 에스파냐 귀족의 딸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신심이 뛰어나서 언니들과 더불어

로사리오와 십자가의 길의 기도 바치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12세 때에는 몇 명의 친구들과 어울려 일본인들을 개종시키려다가

키토 교외 산에서 은수자로 살려는 생각이 떠올라 포기하였다.

그러나 이 일 역시 정치적인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기 고해신부인 예수회원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당에 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독수자처럼 생활하였다.

   그리고 성녀 마리아 안나는 관을 하나 마련한 뒤 매

금요일마다 그 속에서 지내며 죽음을 묵상하기도 하였다.

팔과 다리를 쇠사슬로 묶고 고행자가 입는 말총 속옷을

입었으며, 가시관과 쇠못관을 만들어 고행하였다.

음식은 극히 소량만 먹었고, 물은 그리스도의 갈증을 느낄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입을 축이는 정도였다.

이와 동시에 예언과 기적도 일어났다.

 

1645년 키토 지방에 지진과 더불어 전염병이 번졌다.

사순 제4주일의 강론을 들은 그녀는 자신이 백성의 희생물이

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나섰다.

결국 지진은 멈추었지만 그녀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그녀는 1853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녀는 마리아나 데 파레데스(Mariana de Paredes)로도 불린다.

 
 
 ▶필립보 네리(5.26)
 
 
성인명 필립보 네리(Philip Neri)
축일 5월 2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515-1595년
같은이름 네리오, 네리우스, 비리버,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 태생인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

산마르코의 도미니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에 그는 산제르마노로 가서 사업 경력을 쌓으려고

노력했으나, 자신의 뜻과는 달리 신비체험을 하게 되면서

수도생활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3년에 로마로 갔으며, 그곳에서 어느 부유한

고향 사람의 두 아들을 가르치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사피엔차와 산타고스티노에서 철학과 신학을 3년 동안 공부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길거리나 시장바닥에서 로마인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신앙생활이 극히 미온적이었던 로마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548년 성 필리푸스는 자기의 고해신부인

페르시아노 로사 신부와 함께 '삼위일체 형제회'를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는 어려운 처지의 순례자들을 사목하기 위하여

평신도들로 구성되었으며 '40시간' 신심을 전파하였다.

그는 1551년에 사제로 서품되자마자 고해신부로 명성을 날렸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집단을 이루어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로 몰려왔다.

이곳은 그가 생활하고 있던 사제들의 공동체였다.

그는 수많은 개종자를 얻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도와줄 사제들을 확보하는 일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신자들을 그들의 오라토리오(Oratorio, 방)에 모아놓고

영적 권고와 고해성사를 주곤 하였기 때문에

'오라토리언'(Oratorians)이란 이름으로도 알려졌지만,

실제로 '오라토리오회'가 설립된 연대는 1564년이다.

이때 필리푸스는 산조반니성당의 주임신부였고,

다섯 명의 제자들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1575년에 공식 승인을 받았는데

이때는 그가 이미 로마의 명사로 알려진 때였다.

성 그레고리우스 13세 교황은 그에게 발리첼라의

산타 마리아 성당을 하사했는데, 그는 옛 성당을 철거한 후

그 자리에 '키에사 누오바'를 짓고 오라토리오회의

본원으로 사용하였다.

   이즈음에 그는 '로마의 사도'로 알려졌고, 교황과 추기경

심지어는 권력자들과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영적 지혜와 환시를 통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힘없는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었다.

특히 그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탈혼과 환시를 수차 경험하였고, 기적까지 행하였으며,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1593년에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장상직을 사임하였으며,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로부터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