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4일(토)
聖 베네딕토 맨니, 聖멜리토님..등

성 베네딕토 멘니(Benedictus Me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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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람> **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성 베네딕투스 멘니(베네딕토 멘니)는 1841년 3월 11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루이지 멘리와 루이사 피지니의 15명의
자녀 중 5번째로 태어났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로디(Lodi)의 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성 베네딕투스는 1866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를 부흥시키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1881년 5월 31일 예수 성심 의료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노인들과 버려진 아이들 그리고 소아마비의 희생자들과
정신적으로 질병을 앓는 이들을 돕기 위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들었다.
성 베네딕투스 멘리는 1914년 프랑스 디낭(Dinan)에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에스파냐(Ciempozuelos)에 있는 수녀원 본원에 안치되었다.
그는 1985년 6월 2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99년 11월 2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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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
도다(Doda) |
축일 |
4월 24일 |
성인구분 |
성녀 |
신분 |
수녀 |
활동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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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연도 |
+7세기 |
같은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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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보바(Bova)는 성 발데리쿠스(Baldericus, 10월 16일)의
여동생으로 다고베르트(Dagobert) 왕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덕으로써 왕궁과 나라 전체를 교화하였다.
성녀 보바는 하느님께 자신의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모든 결혼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녀의 오빠인 성 발데리쿠스가 639년 몽포콩에 수도원을 설립한 이후
랭스(Reims)에 베네딕토회 수녀원을 설립하자,
성녀 보바는 680년 죽을 때까지 수녀원장으로서 살았다.
성녀 보바의 조카딸인 성녀 도다는 그녀의 발자취를 따랐고
그녀를 이어 수녀원장직을 계승하였다.
두 성녀의 유해는 후에 랭스의 성 베드로(Petrus) 수도원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비록 두 성녀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0세기에 그곳 수녀들과 관련된 전승들이 작가에 의해 다시 기록되었다.
성녀 보바는 보나(Bona)로도 불린다.
☞ 11......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
▶마리아 아 산타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르(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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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리아 아 산타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르는
1796년 7월 31일 프랑스 서부 방데 연안의 누아르무티에 섬에서
태어났는데, 그녀의 부모는 방데 전쟁을 피하여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18세 되던 1814년 10월 20일 애덕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였고,
1825년에 투르(Tours)에 위치한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앙제에 수녀원을 설립해 달라는 앙제 주교의 요청을 받고
파견되어 '앙제의 착한 목자 애덕 성모 수녀원'을 성공적으로 설립한
뒤에 투르로 돌아왔다.
그러나 앙제 수녀원이 운영상 많은 어려움을 겪자 다시 앙제로 가서
수녀원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녀가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자기 수녀회의 구조를 크게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나 수녀원 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녀는 야심이 많고 순종하지 못한다는 비난과 함께
'능력은 있으나 한 나라를 다스려야 적성이 풀릴 사람'이란 평을 받았다.
마침내 그녀는 앙제에 '착한 목자 수녀회'를 설립하고,
1835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다.
이 수녀회는 윤리적 위험에 처한 여성들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설립되었다.
성녀 에우프라시아가 33년 동안 이 수녀회를 지도하는 동안 110개의
수녀원으로 발전하였는데,
현재 이 수녀회의 회원 수는 10,000명이 넘는다.
그녀는 1868년 4월 24일 앙제에서 선종하였으며,
1933년 시복되고 194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
로마의 수도원장이었던 성 멜리투스(또는 멜리토)는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영국 선교를 위해
수도자들을 파견할 때 캔터베리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5월 27일)에
이어 이진으로 파견된 수도자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보내는 교황의 서한을 동봉했는데,
그 서한에서 교황은 선교지에서 이교도의 신전을 파괴하지 말고
단지 신상들만을 없앤 후 성당으로 사용하는 문제 등
선교사들의 중요한 행동지침을 제시하였다.
켄트(Kent)에서 3년간의 선교활동을 마친 후 604년에
성 멜리투스는 에식스(Essex)의 초대주교로 임명되었고,
그곳의 국왕인 시제베르트를 개종시켜 선교의 기반을 다졌던 인물이다.
그러나 국왕의 아들은 부친이 사망하자 그를 축출했는데,
그 이유는 아직 영세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체'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성 멜리투스는 로체스터의 성 유스투스(Justus, 11월 10일)와 함께
프랑스 지방으로 갔으나 즉시 귀환하라는 명을 받고 돌아와서는
619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성 베다(Beda, 5월 25일)는 그가 육체적으로는 통풍으로 고통을
겪었지만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의 영혼은 더욱 건강하고
활동적이었다고 하며,
“태생으로도 귀족인 그는 마음에 있어서 더욱 숭고한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캔터베리의 성 마리아 성당을 건축한 이도 바로 성 멜리투스이다. |
성 빌리암 피르마투스(빌리암 피르마토)는 프랑스의 투르 사람으로
아주 젊은 나이에 그곳의 성 베난티우스 성당에서 봉사하면서
군인 내지 의사의 꿈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금고 위에 앉아 있는 원숭이 모양의
사탄이 그의 탐욕을 경고하는 말을 들었다.
그 즉시 그는 모든 꿈을 팽개치고는 과부인 모친과 함께 은둔생활로 들어갔다.
모친과 사별한 후에 그는 마옌의 라발 숲 속에 살면서
더욱 엄격한 생활을 했다.
그 후 예루살렘을 처음으로 순례한 뒤에는 브르타뉴와 프랑스의
여러 은둔소를 두루 다녔다.
그 후 그는 두 번째로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였다.
그는 특히 동물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으며,
농부들은 그를 위대한 예언자로 공경하였다.
양과 염소에게 강론을 하고 새들과도 함께 지냈다고 전해오는 그는
윌리엄 피르마투스로도 불린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하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프랑스 리옹에서 특히 맹위를 떨쳤다.
수많은 희생자들 가운데 젊은 두 사람이 단연 돋보였는데
그들이 곧 성 에피포디우스(Epipodius, 4월 22일)와 성 알렉산데르이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친구 사이로 성 포티누스(Photinus, 6월 2일)와
그 동료들이 순교한 후에 리옹을 떠나 어느 과부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도 그들은 체포되었는데,
이때 성 에피포디우스는 신발을 벗어 둔 채 도망치려 하였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후일 이 신발은 성인의 귀중한 유물이 되었다.
그들이 그 지방의 통치자 앞에 끌려나오자 군중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언하고 또 수많은 고문을
당하였어도 태연한 것을 본 관리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겉으로 약해 보이는
성 에피포디우스에게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면서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요지부동이었다.
화가 치민 관리는 입에 재갈을 물리고 또 다시 갖은 고문을 다하였지만
성 에피포디우스의 신앙을 꺾을 수 없게 되자 군중들은 그를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관리는 그를 참수형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이틀 후에 그의 친구인 성 알렉산데르도 똑같은 형벌을 받고
장렬히 순교하였다.
그런데 성 알렉산데르는 십자가형을 언도받았다고 한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너무나 지친 몸을 이기지 못하여
형장으로 가는 도중에 운명하였다. |
성 에그베르투스(에그베르토)는 린디스파른 섬의 젊은 수도자로서
아일랜드에서 학덕과 성덕을 쌓은 앵글로 색슨 사람이다.
그 당시 무서운 전염병이 만연되어 위세를 부릴 때 그는 라트멜시지
수도원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만일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보속할 기회를
허락하신다면 결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서약하였다.
사제로 서품된 후 그는 프리슬란트와 북부 독일에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을 확신하였으나, 하느님의 섭리는 그에게 다른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의 일은 영광스럽거나 위대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사목하는 지역에는 로마 전례, 특히 부활절을 산정하는 방식의
문제로 논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는 티터 섬으로 들어가서 13년 동안 이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또 개인적인 덕을 닦았다.
그는 놀라운 인내심과 성덕과 학덕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았던 그가 운명하는 바로 그날,
90세가량 된 이오나의 어느 수도자가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 교회의 전례에
따라 부활 축일을 헥스햄과 아르질 교구에서 성대하게 지내고 있었다.
성 베다(Beda, 5월 25일)는 그가 주교였다고 기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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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8년 10월 독일 슈바벤 지역의 지크마링겐에서 태어난 성 피델리스는
프라이부르크(Freiburg) 대학교를 마치고 법학박사 과정을 밝으면서
그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스스로 회개생활을 시작했는데,
고행자의 옷을 입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1604년 그는 잠시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봉직하다가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 지방의 아인지스하임에서
변호사로 개업하면서부터 그의 인격과 학문이 괄목할 정도로 발전하였고
또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후 그는 1612년에 사제품을 받고 그해 10월 4일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피델리스라는 수도명을 얻었다.
그는 사제 서품을 앞두고 자신의 유산을 반으로 나누어서
한 몫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른 한 몫은 신학교를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주교에게 증정하였다.
사제로 서품된 후 그는 주로 설교와 고해성사를 주는 임무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품과 재능을 익히 알고 있던 주교는 스위스 그리존 지방의
츠빙글리파에게 파견하여 정통 교리를 수호하도록 명하자,
그는 8명의 다른 카푸친 작은 형제회 회원들과 함께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 사람들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는데 그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며칠 밤을 기도하면서 지냈다.
1622년 2월 24일 그루쉬에서 열정적으로 설교한 뒤 한 동안
탈혼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수사들을 죽여라!'라는 외침을 무시하고
세비스(Sewis)로 돌아와 미사를 봉헌하다가 성난 군중들 앞에 당당히 나아가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다.”는 설교를 하고
군중들의 공격을 받아 1622년 4월 24일 순교하였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츠빙글리파 성직자들이 개종하였다.
그는 1729년 3월 12일 시복되었고, 1746년 6월 26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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