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4월10일 聖女막달레나 데 카노사님..등

H-Simon 2010. 4. 9. 20:11

 

 

 

 
4월10일(토)
聖女막달레나 데 카노사님..등
 

 

 

 베로나의 성녀 막달레나 데 카노사(Magdalena de Canos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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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람>   **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복자 마르코 판투치** Mark Fantucci 4월 10일 총장   +1479년
2 마카리오**  Macarius 4월 10일 주교 안티오키아(Antiochia) +1012년
3 성녀

막달레나

  데 카노사** 

Madeleine de Canossa 4월 10일 설립자 베로나(Verona) 1774-1835년
4 말코 Malchus 4월 10일 주교 워터퍼드(Waterford) +1110년
5 미카엘 데 상티스**  Michael de Sanctis 4월 10일 수사   1589-1625년
6 바데모 Bademus 4월 10일 수도원장 페르시아(Persia) +376년
7 베다 Bede 4월 10일 수도승   +883년
8 베오카 Beocca 4월 10일 수도원장,순교자   +870년경
9 아폴로니오 Apollonius 4월 10일 신부,순교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연대미상
10 아프리카노 Africanus 4월 10일 순교자   +250년
11 복자 안토니오 네이롯**  Anthony Neyrot 4월 10일 순교자   +1460년
12 에제키엘**  Ezekiel 4월 10일 구약인물,예언자,순교자   +6세기BC
13 에토르 Ethor 4월 10일 신부,순교자   +870년경
14 테렌시오 Terence 4월 10일 순교자   +250년
15 파테르노**  Paternus 4월 10일 은수자 압딩호프(Abdinghof) +1058년
16 팔라디오 Palladius 4월 10일 주교 오세르(Auxerre) +661년
17 폼페요 Pompeius 4월 10일 순교자   +250년
18 풀베르토**  Fulbert 4월 10일 주교 샤르트르(Chartres) +1029년경

총 18 성인

 

 

 

막달레나 데 카노사(4.10)
 
성인명 막달레나 데 카노사(Madeleine de Canossa)
축일 4월 1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베로나(Verona)
활동연도 1774-1835년
같은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Maddalena di Canossa (1774-1835) 

   1774년 3월 1일 이탈리아 베로나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성녀 막달레나(Magdalena)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남겨둔 채 재혼하여 떠나버렸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8세였다.
그의 형제들은 삼촌 밑에서 자랐는데, 삼촌의 학대 때문에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수녀가 될 마음으로 가까이 있던 카르멜회로 갔으나 성소가 없었던지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 당시 나폴레옹이 전쟁을 일으켰는데 바로 그 나폴레옹이 그
녀의 카노사 성을 둘러보러 왔을 때, 그녀는 용기를 내어 텅 비어 있던
성 요셉(Josephus) 수도원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쾌히 승낙하였다.
그녀는 여기서 가난한 사람과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사업을 착수하였다.

   또 성녀 막달레나가 베네치아로 갔을 때에는 빛나는 옷을 입은 6명의
수도자들에 둘러싸인 성모님의 환시를 보고 즉시 성모의 명을 따라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모든 사업은 나폴레옹의 도움이 컸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애덕의 딸 카노사 수녀회’를 설립한 것이다.
비오 11세는 그녀를 이렇게 평하였다.
“많은 이들이 자선사업을 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으나,
가난한 사람과 더불어 가난해 지기는 지극히 어려운데
그녀는 실제로 가난하였다.”
그녀는 1941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8년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마르코 판투치(4.10)
 
성인명 마르코 판투치(Mark Fantucci)
축일 4월 10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총장
활동지역  
활동연도 +1479년
같은이름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쿠스, 마크, 말구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던 마르코 판투치(Marcus Fantucci)는 26세의 나이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서약을 하였다.
그는 3년 후에 몬테 콜롬보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설교가 뛰어났으므로 카피스트라노의 성 요한(Joannes, 10월 23일)
으로부터 관구 밖에서도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두 번씩이나 관구장을 역임한 그는 후에 총장까지 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 개혁운동을 일으켜 설립자의 정신을 회복시키려고
애를 썼고, 터키에 포로가 된 회원들을 구출하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교황 바오로 2세가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려는 눈치를 채고
시칠리아(Sicilia)로 잠적한 적이 있다.
그는 피아첸차에서 사순절 선교활동을 하던 중에 병을 얻어 운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68년에 승인되었다.

 

 

 

 

마카리오(4.10)
 
성인명 마카리오(Macarius)
축일 4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안티오키아(Antiochia)
활동연도 +1012년
같은이름 마까리오, 마까리우스, 마카리우스

 

   성 마카리우스(마카리오)는 플랑드르(Flandre)의 대표적인 성인이자
모든 질병에 걸린 이들, 특히 흑사병에 걸린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생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에 대한 공경은 대단하다.
아마도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970년경에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로 선임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외부의 어떤 위협에 따라 잠시 교구를 떠나 몸을 피하였고,
자기 소유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뒤에 예루살렘을 순례하였으나,
그곳에서 사라센인들에게 잡혀 투옥되었다가 유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그는 마인츠(Mainz), 쾰른(Koln), 말리너스, 캉브레(Cambrai)
그리고 투르네를 거쳐 벨기에의 겐트(Gent)에 정착하였다.
 
처음에 그는 불쌍한 순례자로 보였지만, 그 지역을 휩쓴 흑사병을
퇴치한 후 그의 진면모가 밝혀져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1012년 자신이 머물던 겐트의 성 바보(Bavo)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래서 그는 겐트의 성 마카리우스로도 불린다.

 

 

 

 

미카엘 데 상티스(4.10)
 
성인명 미카엘 데 상티스(Michael de Sanctis)
축일 4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1589-1625년
같은이름 마이클, 미가엘, 미구엘, 미키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Cataluna)의 비크에서 출생한

성 미카엘은 6세 때부터 자기는 수도자가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이야기했을 때,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이 성인을 글자 그대로 본받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 후 양친을 잃었을 때 그는 잠시 장사꾼이 되었는데, 그는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할 수 있으면 성무일도를 바쳤고,

시간이 없을 때에는 성모소일과를 바쳤다.

   1607년 그는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삼위일체회에 입회하여 서원하였다.

그 후 그는 세비야와 살라망카에서 수학한 뒤 사제가 되었고,

그의 덕과 능력을 인정받아 두 번이나 원장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수도자들은 그를 단지 원장으로 뿐만 아니라 성인으로 공경했는데,

특히 그의 성체신심은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을

깨닫게 하였다.

그는 미사 중에 탈혼에 빠진 적이 수차례나 된다.

그는 36세의 일기로 선종했는데, 1862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안토니오 네이롯(4.10)
 
성인명 안토니오 네이롯(Anthony Neyrot)
축일 4월 10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460년
같은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토니우스 네이롯(안토니오)은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리볼리 태생으로
피렌체의 산마르코에서 도미니코 회원이 되어
성 안토니누스(Antoninus)의 지도를 받았다.
서원을 한 뒤 그는 시칠리아의 어느 수도원으로 파견을 받고 부임하러
가던 중, 그가 탄 배가 나폴리와 시칠리아 사이에서 해적들에게 나포되었다.
이때 그는 튀니스(Tunis)로 끌려가서 노예로 팔렸다.

   다행히 그는 자유를 얻는데 성공했으나 코란을 배우려는 일념으로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모슬렘이 되기까지 하였다.
7개월가량 거짓 예언자의 신앙생활을 하던 그가 갑자기 눈을 뜨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성 안토니누스의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그 즉시 그는 아내를 떠나 보속을 행하면서 회개의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그는 튀니스로 가서 수많은 군중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또 마호메트교의 부당성을 설파하여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돌과 칼을 맞고 순교하였다.
후일 그의 유해는 제노바(Genova) 상인들의 도움으로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순교자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세기 중엽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에제키엘(4.10)
 
성인명 에제키엘(Ezekiel)
축일 4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구약인물, 예언자,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6세기BC
같은이름  

 

   구약성서 대예언서에 속하는 에제키엘서의 저자인 성 에제키엘은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한 사건을 전후로 20여 년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였다.
에제키엘서는 총 48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에제키엘 자신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에제키엘은 ‘부지’라는 사제의 아들이었다(1,3).
그래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이룬다.
사실 ‘사제’가 에제키엘서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그는 혼인도 하고, 자기 집에 원로들을 모아 놓고 말을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8,1; 20,1).

   그런데 에제키엘서를 보면 그가 매우 독특한 예언자임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의 가장 신비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는 그는,
환시들을 보고 때로는 며칠씩 황홀경에 빠진다
(1,1. 4-28; 3,10-15; 37,1-10 등).
많은 상징적인 행동을 하고, 이따금 농아나 마비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또 집에 앉아 있으면서 환시 속에 예루살렘을 돌아다니기도 한다(8장).

   에제키엘은 하느님과 동족에 대하여 열정을 지닌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동시에 냉철하고 심사숙고하고 자기의 생각을 엄격한 논리에 따라
전개시키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훌륭한 신학자였다.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인 성전과 그 의식에 관하여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40장 이하), 민족의 역사와 전통도 자기의 독창적
역사관을 내세울 정도로 깊이 알고 있었다(16장, 20장, 23장 참조).
그는 또 널리 퍼져 있던 신화나 동화 같은 것을 과감히 받아들여 자기의
가르침에 적용시키는 개방된 신학자였다.
그리고 세계정세(25-32장)는 물론, 당시 세계 최대의 무역항이었던
티로의 교역 내용까지도 훤히 알고 있었다(27,12-25). 또한 조선 기술도
거침없이 서술할 수 있는 폭넓은 지식의 소유자였다(27,3-11).

   이러한 박식함은 예언자의 사명 수행에 필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듣는 유다인들은 국제 정치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국제적으로 보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이스라엘은 ‘반항의 집안’이라고 끊임없이 되풀이되듯,
에제키엘의 청중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들이었다(2,3).
그래서 그들을 회개시키려고 예언자는 자기의 지식을 총동원하였을 뿐더러,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하느님 백성 전체와 그 구성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효과적으로 선포하려는 노력이었다.

   사실 에제키엘은 사목자였다.
그는 ‘파수꾼’으로 세워졌다(3,16-21; 33,1-9). 파수꾼은 성안에 있는 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주변을 살피고, 작은 위험이라도 닥쳐오면
사람들에게 바로 알려, 준비를 갖추고 재난을 막거나 피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예언자 파수꾼’은 외부의 위험만 알리지 않는다.
각자에게 해당되는 경고를 개별적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악인에게는 악을 버리고 돌아서라고 경고하고,
의인에게는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해야 한다.
이 파수꾼은 자기에게 맡겨진 이들의 삶과 죽음에 개인적으로
깊이 관여하는 사목자인 것이다.

   이 점이 에제키엘을 그 이전의 예언자들과 구분 짓게 하는
큰 특색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시대의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다른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에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공동체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회개를 부르짖으며 또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에제키엘의 시대는 기존의 공동체가 와해되는 때였다.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전부터 이미 종교, 정치, 사회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민족 전체가 불행에 빠지면서,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18장).
그래서 예언자는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못지않게 각 구성원에게도
배려를 아끼지 않아야 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예언자상도 바뀐 것이다.
에제키엘은 시대의 요청에 따라 달라진 예언직에 과감히 투신하였다.
어떤 면에서 책임이 더욱 무거워졌지만,
그는 주저 없이 말씀의 선포에 모든 것을 바쳤다.
교회에서는 에제키엘을 예언자이자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다.

 

 

 

 

파테르노(4.10)
 
성인명 파테르노(Paternus)
축일 4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압딩호프(Abdinghof)
활동연도 +1058년
같은이름 빠떼르노, 빠떼르누스, 파테르누스
 
   성 파테르누스(또는 파테르노)는 아일랜드 사람이지만 독일의
베스트팔렌(Westfalen)으로 건너가서 성 마인베르크가 세운 압딩호프
수도원의 초대 수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완전한 은거를 희망하였던 그는 수도원과 인접한 곳에 움막을 짓고
숨은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민들이 죄를 뉘우치지 않으면 30일 내에 온 도시가 불로 망한다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다. 1058년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 금요일 이상한 불이 번져 온 도시가 소멸되었다.
이때 그가 살던 움막도 불탔다고 한다.

 

 

 

 

풀베르토(4.10)
 
성인명 풀베르토(Fulbert)
축일 4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샤르트르(Chartres)
활동연도 +1029년경
같은이름 풀베르또, 풀베르뚜스, 풀베르투스, 풀베르트

샤르트르의 성 풀베르토(Fulbertus)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성 풀베르투스(풀베르토)는
프랑스 랭스(Reims)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스승인 게르베르투스가 교황 실베스테르 2세로 등극할 때 로마(Roma)로
돌아왔으나, 1003년에 교황이 서거하자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서
샤르트르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그곳의 학교를 맡아 지도하였는데, 그 학교는 유럽 제일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샤르트르의 주교로 선출되자 그곳의 주교좌를 재건하였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학덕으로 인하여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개종하였다.
그가 쓴 설교, 찬미가, 편지 그리고 몇 편의 논문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그는 풀베르트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