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4월8일 聖디오니시오, 聖女율리아님..등

H-Simon 2010. 4. 8. 05:19

 

 
4월8일(목)
聖디오니시오, 聖女율리아님..등

           


                   

 코린토스의 성 디오니시오(Dionys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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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람>   **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디오니시오 ** Dionysius 4월 8일 주교 코린토스(Corinthos) +180년
2 레뎀토 Redemptus 4월 8일 주교 페렌티노(Ferentino) +586년
3 성녀 마카리아 Macaria 4월 8일 순교자   +연대미상
4 성녀 막시마 Maxima 4월 8일 순교자   +연대미상
5 발테르** Walter 4월 8일 수도원장 퐁투아즈(Pontoise) +1095년
6 아만시오 Amantius 4월 8일 주교 코모(Como) +440년
7 아신크리토 Asyncritus 4월 8일 사도들의 제자,주교,순교자 마라톤(Marathon) +1세기
8 야누아리오 Januarius 4월 8일 순교자   +연대미상
9 에데시오 ** Aedesius 4월 8일 순교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306년
10 성녀 율리아 빌리아르** Julia Billiart 4월 8일 설립자 나무르(Namur) 1751-1816년
11 복자 율리아노(성 아우구스티노의)** Julian of St. Augustine 4월 8일 수사   +1606년
12 성녀 콘체사 Concessa 4월 8일 순교자 카르타고(Carthago) +연대미상
13 복자 클레멘스 ** Clement 4월 8일 은수자 오시모(Osimo) +1291년
14 페르페투오** Perpetuus 4월 8일 주교 투르(Tours) +494년경
15 플레곤 Phlegon 4월 8일 사도들의 제자,주교,순교자 히르카니아(Hyrcania) +1세기
16 헤로디온 Herodion 4월 8일 사도들의 제자,주교,순교자 파트라스(Patras) +1세기

총 16 성인

 

 

디오니시오(4.8)
 
성인명 디오니시오(Dionysius)
축일 4월 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코린토스(Corinthos)
활동연도 +180년
같은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코린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디오니시오) 주교는 2세기의 감동적인
설교가이자 뛰어난 교회의 지도자였다.
오늘날 그는 가르치고 훈계하며 위로를 주려했던 교회작가로 부각되어 기려진다.
여러 교회에 보냈던 몇 개의 편지가 현재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로마에서 발생한 사도 베드로(Petrus)와
바오로(Paulus)의 순교 기록이다.
코린토스에 신앙을 퍼뜨린 후 두 사도들은 이탈리아로 갔고
그곳에서 그들의 증언을 피로써 보증했다.

   교회 역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다른 교회에 보낸
교훈적인 편지들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교황 성 소테르(Soter, 4월 22일)의 재임 기간 중 로마 교회에서 받은
전통적 지원금에 대해 로마 교회에 쓴 감사 편지이다.
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초부터 모든 곳에 지원금을 주어 많은 교회들이 존재할 수 있는
윤택함을 주는 것이 로마 교회의 관습이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교부들의 예를 따라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의
필요에 적절한 위안을 주었습니다.
로마 교회의 복된 주교 소테르는 그런 점에서 조상들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 위로와 조언을 차치하고라도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부드러운 음식의 보고를 주시며 모든 이가
그에게 다가오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주님의 날을 함께 경축하며
클레멘스가 우리에게 보내셨던 편지를 읽었던 것과 동일하게
교황님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성 디오니시우스는 오히려 성서의 잘못에서 기인하는 그릇된
학설보다 이교도적 철학 원리를 수용하면서 생기는 과격한 이론(異論)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교적 오류의 근원과 철학적 분파에서 생기는 각각의 오류들을
지적해내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성 디오니시우스가 평화롭게 선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위해 많은 싸움을 했기에 순교자로 섬기고 있다.
라틴 교회는 그를 증거자로서 공경한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그의 유해를 파리 근처에 있는 생드니(Saint-Denis)
대수도원으로 옮겼고, 그곳의 수도자들은 그를 아레오파고(Areopagos)의
성 디오니시우스(10월 9일)로 믿었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11월 20일이나 29일에 지낸다.

 

 

 

  발테르(4.8)
 
성인명 발테르(Walter)
축일 4월 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활동지역 퐁투아즈(Pontoise)
활동연도 +1095년
같은이름 발떼르, 발터, 왈터, 월터
 
   성 발테르는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ie) 출신으로 학문의 여러 전당에서
공부하여 철학과 수사학의 저명한 교수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러베앙브리(Rebais-en-Brie)의 베니딕토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국왕 필립 1세로부터 천거되어 퐁투아즈 새 수도원의 원장으로 뽑혔다.
그 당시의 관습에 따라 그가 통치자로부터 주교직을 받으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하느님의 사람이지 폐하의 사람이 아니며, 교회로부터 직책을
수여받습니다.” 용기 있는 그의 이 말로 인하여 국왕 필립은 그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퐁투아즈를 몰래 떠나 클뤼니(Cluny) 수도원으로 가서
숨은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에게 발견됨으로써 다시 원래 원장으로 되돌아왔으나 재차
도망하여 로와르 섬의 어느 은둔소로 피신했다가 또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윽고 그는 교황에게 이 짐을 풀어달라고 요청하자 교황은
그의 탁월한 능력을 다른 곳에 바치도록 허락했다.

   그가 은둔소에서 철저한 고행을 하면서 당한 고통은 성직 매매자들의
반대에서 오는 고통에 비기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어떤 때에 그는 같은 성직자들로부터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은 경우도
있었다.
만일 어떤 수도자가 그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그는 이 숨은 생활에서 1095년 성 금요일에 성무일도를 바치던 중에
탈혼에 빠졌고, 그길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는 월터로도 불린다.

 

 

 

에데시오(4.8)
 
성인명 에데시오(Aedesius)
축일 4월 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연도 +306년
같은이름 아이데시오, 아이데시우스, 에데시우스
 
   성 에데시우스는 소아시아 남서쪽 끝에 위치한 리키아에서 태어났다.
로마 순교록은 그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순교자 성 아피아누스(Apphianus, 4월 2일)의 형제인 성 에디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하느님께 성별된
처녀들을 포주에게 넘긴 사악한 판단에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 교회 역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와 에디시우스의 칼데아 행전은
더 상세한 증언을 남기고 있다.
이 증언들에 의하면 그는 철학자였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망토를 입곤 했다.
이것은 아마도 교육받은 이들 사이에서의 그의 지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관리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주저도 없었다.
결국 그는 수차례 투옥당했고 팔레스티나의 광산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석방된 후 그는 이집트로 피난했으나 지방장관 히에로클레스의 통치하에서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성별된 처녀들을 노예로 삼고 매춘을 시킨 정부에 무척 불쾌했던
에데시우스는 장관 앞에 자진 출두했고,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가장 잔인한 형벌을 당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바다에 빠뜨려
익사시키는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율리아 빌리아르(4.8)
 
성인명 율리아 빌리아르(Julia Billiart)
축일 4월 8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나무르(Namur)
활동연도 1751-1816년
같은이름 줄리아, 쥴리아

 

   부유한 농가 태생인 성녀 율리아 빌리아르는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ie) 지방의 보베(Beauvais) 교구에 속한 퀴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마리아 로사 율리아(Maria Rosa Julia)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늘 신앙생활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왔는데,
특히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녀는 신비스런 병으로 마비되어 걷지 못하였고,
혁명 정부에 선서한 사제들을 반대하고 또 도망을 다니는 사제들을 숨겨준
일들이 정부 당국에 알려지자 자신도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얼마동안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아미앵(Amiens)에 머물렀다.
후일 그 친구들이 그녀가 수도회를 설립하였을 때 초기 회원들이 되었다.
그녀는 여기서 '신앙의 사제회' 원장 신부인 바랭 신부를 만났다.

   1804년 성녀 율리아는 자작 부인 프랑수아즈와 함께 아미앵 교구장의
후원과 바랭 신부의 지도하에 노트르담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녀회는 가난한 어린이들의 종교교육과 신앙교사들의 훈련 및
여성들의 그리스도교 교육에 헌신하려는 목표로 설립되었다.
그들은 고아원도 개설하였다.
그리고 수녀원이 설립된 해에 성녀 율리아는 아미앵 선교 도중 앙팡탱
신부가9일 기도를 바친 후 자신에게 걷도록 명했을 때 기적적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실로 22년 만에 걸음을 걷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바랭 신부가 떠나고 그의 후계자로 노트르담 수녀회의 고해사제로
임명된 신부가 이 수녀회에 대하여 반목하는 처지로 돌변하자,
아미앵의 주교는 1809년 내에 성녀 율리아로 하여금 아미앵 교구를
떠나도록 명하였다.

   그래서 성녀 율리아는 수녀회 모원을 벨기에 남부,
프랑스와 국경을 이루는 나무르로 이동하였다.
물론 그 사건은 나중에 무마되었지만 그녀는 모원을 그곳에 그냥 두었다.
그녀는 여생을 수녀회의 확장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으며
15개의 수녀원이 세워지던 1816년 4월 8일 과로와 노환으로 나무르에서
운명하였다.
그녀는 1906년 5월 13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69년 6월 22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율리아노(성 아우구스티노의)(4.8)
 
성인명 율리아노(성 아우구스티노의)(Julian of St. Augustine)
축일 4월 8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수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1606년
같은이름 율리아누스, 줄리안, 줄리언

성 아우구스티노의 성 율리아노(Julianus)

   프랑스 기사의 후예인 율리아누스 마르티네는 에스파냐 카스티야 지방
세고비아(Segovia) 교구의 메디나첼리(Medinaceli)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그는 고향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을 출입하다가 성소를 확인하고
수도자가 되었으나 지나친 엄격성과 특이한 신심으로 인하여 장상들로부터
정신이상이거나 적당치 못한 지원자로 낙인 찍혔다.
래서 그는 양복공이 되었는데 수도자들이 이 젊은 양복공의 재능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길거리를
다니면서 종을 치고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모았다.
그래서 그는 또다시 작은 형제회 회원이 되었는데 그의 행동은
이전과 같았다.
그는 자신의 은둔소를 짓고 고독한 가운데서 엄격한 생활을 하며
문전걸식하였다.
이 은수자의 성덕이 작은 형제회 장상들에게 알려지면서부터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율리아누스라는 이름으로 서약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덕이 너무나 출중하여 필립 4세의 모친인 마가렛 황후조차
그를 만나기를 소망해서 장상의 명으로 왕궁으로 갔으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825년 교황 레오 12세(Leo X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클레멘스(4.8)
 
성인명 클레멘스(Clement)
축일 4월 8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오시모(Osimo)
활동연도 +1291년
같은이름 글레멘스, 끌레멘스, 클레멘쓰, 클레멘트

 

   클레멘스(Clemens)는 이탈리아의 산텔피디오에서 출생하였고,

그의 이름으로 보아서 그가 머문 적이 있는 오시모와 관계가 있는 듯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270년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재임 중에 회헌을 입안하여 1287년에 승인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 수도회의 제2의 설립자로서 높은 공경을 받아왔다.

   또한 그의 덕행이 출중하였으므로 후일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가 된

베네딕투스 가예타니 추기경의 고해신부로 활약했고,

후일의 교황은 이미 그를 성인으로 간주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수를 다하고 운명하였다. 그의 사후 70년 후에

교황 니콜라우스 4세가 경당을 짓도록 명하였는데,

그곳에서 연일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는 은수자 중의 은수자였다고 흔히들 말한다.

 

 

 

페르페투오(4.8)
 
성인명 페르페투오(Perpetuus)
축일 4월 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투르(Tours)
활동연도 +494년경
같은이름 뻬르뻬뚜오, 뻬르뻬뚜우스, 페르페투우스

 

   성 페르페투우스는 성 에우스타키우스(Eustachius)를 계승하여
투르의 주교가 된 이래 30여 년 동안 교구를 지도하여 가톨릭 신앙을
널리 전하고 규율을 강화시켰으며, 단식 규범과 축일들을 제정하여
엄격하게 지키도록 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기할 만한 것은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축일부터 성탄절까지
매주 월요일마다 단식한 것이다.
투르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는 120년 후인 자기 시대에도
그의 이 규정이 지켜지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