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4월2일 聖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 聖女마리아님..등

H-Simon 2010. 4. 2. 14:23

 

 
4월2일(금)
聖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 聖女마리아님..등

 

 

 

 성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Franciscus Coll Guitart)

 

 

 

 

16.jpg

 

 

 

 

 

 

<일  람>   **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니체시오 ** Nicetius 4월 2일 주교 리옹(Lyon) +573년
2 복자 레오폴도 ** Leopold 4월 2일 수사 가이체(Gaiche) 1732-1815년
3 성녀 마리아  ** Mary 4월 2일 은수자 이집트(Egypt) +500년경?
4 아분디오 Abundius 4월 2일 주교 코모(Como) +469년
5 아피아노 Apphian 4월 2일 순교자 리키아(Lycia) +306년
6 요한 페인 John Payne 4월 2일 신부,순교자 영국(UK) +1582년
7 우르바노 Urban 4월 2일 주교 랑그르(Langres) +390년
8 성녀 테오도시아 ☞5 Theodosia 4월 2일 동정 순교자 티레(Tyre) +306년
9 프란치스코** Francis 4월 2일 은수자,설립자 파울라(Paula) 1416-1507년
10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 **

Francis Coll Guitart 4월 2일 신부,설립자   1812-1875년

총 10 성인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4.2)
 
성인명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Francis Coll Guitart)
축일 4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812-1875년
같은이름 귀타르트,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에스파냐 북동부 피레네 산맥과 면한 카탈루냐의 곰브레니(Gombreny)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는 비크(Vich)에 있는 교구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830년 헤로나(Gerona)의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835년 교회에 반대하던 정부에 의해 헤로나의 신학원이 폐쇄되고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날부터 성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는 죽는 날까지 수도 공동체의 어떠한

지원도 없이 도미니코 수도회의 성소를 영웅적인 신앙으로 지켜왔다.

   결국 그는 1836년 비크의 교구 신학교로 돌아와 사제품을 받고 몇 년 동안

본당사목을 한 후 그의 친구의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클라렛

(Antonius Maria Claret, 10월 24일)과 함께 순회설교자로 나섰다.

 

그는 1856년 그가 설교하는 지역의 가난한 이들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 탄생 예고의 도미니코 수녀회(La Annunciata)를 설립하였다.

이 수녀회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여개의 수녀원으로 성장했고

오늘날 유럽과 아메리카에 140개 이상의 수녀원을 두고 있다.

1869년 설교 도중 눈이 멀게 되고 건강도 이전 같지는 않았지만

그는 끝까지 은퇴하지 않았다.

1875년 4월 2일 선종한 그는 자신이 설립한 수녀회의 모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1979년 4월 2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9년 10월 11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니체시오(4.2)
 
성인명 니체시오(Nicetius)
축일 4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리옹(Lyon)
활동연도 +573년
같은이름 니지에르, 니체시우스, 니체씨오, 니체씨우스, 니케티오, 니케티우스
 
   프랑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의 큰삼촌인
성 니케티우스(니체시오)는 부르고뉴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제가 된 뒤에도 그는 홀로된 어머니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효성으로
어머니를 공경했다고 한다.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어린이들은 시편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또 하인들과 노동하는 사람들도 이를 실천하도록
적극 계몽하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는 국왕의 방문을 받고 리옹의 주교로 발탁될 정도로 성덕이 높았던 것이다.
특히 그는 부정한 악령을 쫓아내는 구마력으로 명성이 높았고,
교회 음악을 개선하여 교회마다 적극 사용토록 한 것은 큰 공로로 평가되었다.
그는 니지에르(Nizier)로도 불린다.

 

 

  ▶레오폴도(4.2)
 
성인명 레오폴도(Leopold)
축일 4월 2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수사
활동지역 가이체(Gaiche)
활동연도 1732-1815년
같은이름 레오폴두스, 레오폴드

 

   이탈리아 페루자(Perugia)의 가이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레오폴두스(레오폴도)는 요한(Joannes)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인근 사제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18세 되던 해인 1751년에 치보톨라에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레오폴두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757년에 사제가 된 그는 주로 사순절 순회설교를 담당했는데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선교사와 설교자들이 은퇴한 뒤에 머무를 수도원을

지으려고 하였으나 난관이 너무나 많아서 지체하다가,

결국에는 스폴레토 교외 몬테 루코 언덕 위에 자신의 소망을 이룩할 수 있었다.

 

1808년 나폴레옹의 침략 때에 그는 77세의 고령으로 투옥되었고,

나폴레옹의 실각과 더불어 몬테 루코로 다시 돌아왔으나 몇 달 후에 선종하였다.

그는 1893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마리아(4.2)
 
성인명 마리아(Mary)
축일 4월 2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이집트(Egypt)
활동연도 +500년경?
같은이름 메리, 미리암

 

마르칸토니오 프란체스키니의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Maria)의 마지막 영성체

   젊은 테오도시우스의 통치 때 팔레스티나에는 한 곳에서만 43년 동안 살았고,
하느님만 섬기는 성 조시무스(Zosimus, 4월 4일)라는 수도자가 있었다.
그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요르단으로 향하였으나, 자신은 자기 수도원과
20일 간의 거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기도시간이 되어 시편을 외우고 있었다.
이때 그는 “조시무스 신부님, 나는 여자입니다.
당신의 겉옷을 던지면 나를 볼 수 있습니다”라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의 주인공이 곧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이다.
그녀는 이집트 여성으로 17년 동안이나 거리의 여성으로 살아 왔는데,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28세 때 그녀는 예루살렘으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러 가는
일단의 무리들과 합류하게 되었는데, 여행을 하는 도중에 자기의 악습을
고치지 못하고 열심한 순례자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예루살렘에 당도하여 성당에 들어가려 하니,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듯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서 있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윽고 눈을 들어 마리아상을 바라보니,
그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고 한다.
그때서야 그녀는 밝은 마음으로 성당으로 들어갔고 깊이 통회하니,
“너는 요르단으로 가서 여생을 지내라”고 명하여
이렇게 사막에 산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요르단 사막에서 47년 동안이나 사람 한 사람 구경하지 못하고 살았다.

   성 조시무스는 그녀를 위해 성체를 영해 주고,
다음 해에 만나기로 하고 돌아왔다.
다음 해에 그가 다시 만나 성체를 영해 주고 그녀가 약속한 두 번째 지점으로
갔으나 그녀는 이미 운명하고 있었다.
“조시무스 신부님, 가련한 마리아를 장사지내 주십시오.” 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이 사실을 자기의 모든 형제들에게 이야기 해 주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피아노와 테오도시아(4.2)
 
성인명 아피아노(Apphian)
축일 4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리키아(Lycia)
활동연도 +306년
같은이름 아삐아노, 아삐아누스, 아피아누스, 압삐아노, 압삐아누스, 압피아노, 압피아누스
 

   성 아피아누스(아피아노)는 소아시아 남서쪽 끝에 위치한 리키아 출신으로

페니키아의 베리투스에서 학교를 다니던 중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 후 19세 때에 카이사레아(Caesarea)로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지방 총독이 모든 주민들은 신전에 희생을 바치라는 포고령을 내려

거창한 예식이 시작되었는데, 그는 아무런 성의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행동을

취하여 문제가 되었다.

감독관은 무조건 그를 발길로 찬 뒤 지하 감옥에 넣었다.

그리하여 심문이 시작되었을 때 아피아누스는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오.”

하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들은 아피아누스의 발을 기름에 튀기는 형을 가한 뒤 신전 앞으로

끌고 갔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오직 한 천주이신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바다에 던져져서 순교하였다.

   이즈음 티레 출신인 성녀 테오도시아(Theodosia)는

카이사레아의 성녀라고 불리었는데, 그녀는 죽음을 앞둔 죄수들을

찾아가서 하느님을 잊지 말고 신앙을 고백하라고 타이르거나 그

들을 위로하며 동분서주하였다.

이윽고 그녀 역시 그리스도인임이 발각되어 창으로 옆구리가 찔리고,

가슴을 도려내는 형벌을 받은 후 바다에 던져지는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8 ;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프란치스코(4.2)
 
성인명 프란치스코(Francis)
축일 4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설립자
활동지역 파울라(Paula)
활동연도 1416-1507년
같은이름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파울라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416년 3월 27일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지방 코센차의 파울라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는 산마르코에서 프란치스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13세 때에 산마르코 수도원에서 1년 동안 생활하면서
기도와 금욕과 겸손을 익혔다. 그리고 15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영지인
파울라 교외에서 홀로 지내며 6년 동안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동료들이 불어나서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공동체가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Minimi Fratres, least brothers)의 시작이었다.
그는 자신이 은수생활을 하던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회개와 애덕 그리고
겸손을 특히 강조하는 회칙을 확정하였으며,
세 가지 서원 외에 단식과 음식의 절제 서원을 덧붙였다.
또한 그는 3회원과 수녀회를 위한 회칙을 만들었다.

   그의 생활이 거룩하고도 엄격하였던 만큼 그의 영적 영향 또한 커졌고
특히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명성은 곧 프랑스로 번졌다. 그가 지닌 예언의 은혜 역시 뛰어났고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수도회는 1474년 교황 식스투스 4세로부터 승인을 받았는데,
이때 이 수도회의 이름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은수자회'였다.
그 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수도회의 설립을 허가받으면서
그 이름을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로 변경하였다.

   그의 명성이 죽어가는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의 귀에까지 전해져서
왕이 그를 보기를 원하자 교황은 그가 프랑스로 가도록 명하였다.
왕은 성 프란치스코만이 자신을 치료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는 비록 치유되지는 못하였지만 큰 위로를 받고 만족했으며,
이 때문에 루이의 아들인 샤를 8세가 성 프란치스코의 친구가 되어
프랑스 내의 여러 곳에 수도원을 지어주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생애의 후반기 25년을 프랑스의 플레시 수도원에서
 지냈는데, 마지막 3개월 동안은 투르(Tours)에서 고독하게 지내면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그는 파스카 목요일에 회원들에게 사랑의 실천과 엄격한 생활을 당부한 후,
다음날 총장 대리를 선출하고 영성체를 한 다음 요한 복음 수난기를 들으면서
1507년 4월 2일 조용히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그가 설립한 수도회의 여러 수도원들에 나뉘어 묻혔으며,
1519년 5월 1일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43년 3월 27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해상 여행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그의 많은 기적들이 바다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