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4월1일 聖발레리코, 聖후고님..등
H-Simon
2010. 4. 2. 14:20
4월1일(목)
聖발레리코, 聖후고님..등
뢰콘의 성 발레리코(Waleri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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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람> **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
성 발레리쿠스는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의
어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목동으로서 양을 지키면서 수시로 읽기 공부를 하여 시편을 외울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삼촌이 그를 데리고 오튀모 수도원을 방문했는데,
그 소년은 이곳이 좋으니 그대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려 수도원에
머물 허가를 받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몇 년 후 그는 그곳을 떠나 오세르 교외의 성 게르마누스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그의 체류는 장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의 수도자들은 적당한 스승을 만나
완덕의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는데,
발레리쿠스도 그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자신의 도움으로 회개한 귀족 출신인 보보와 함께 뤽세이유에
수도원을 세우고 영적 생활을 하다가 그곳에 정착하였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수도원 정원을 경작하는 일이었다.
그 후 국왕 테오도리쿠스의 추방령에 따라 발돌라누스라는 수도자와 함께
네우스트리아에 정착하여 그곳 주민들에게 자유롭게 설교하였다.
그의 탁월한 설교와 기적 때문에 수많은 개종자들이 나왔다.
그 후부터 발레리쿠스는 솜머 강 하구에 은둔소를 짓고 독수생활을
시작하여 6년을 살았다.
그동안 그는 자연과 매우 친숙해졌는데 동물들과 허물없이 살았으며
새들과 노래하였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무죄한 창조물을 음식으로 먹지 말라.”
발라리쿠스(Walaricus) 또는 발레리(Valery)로도 불린다. |
프랑스 도피네의 발랑스 근교에서 태어난 성 후고는 평신도로서 발랑스의
주교좌성당에서 활동하다가 주교의 협조자가 되었다.
그는 성직매매를 반대하는 주교의 캠페인에 적극 가담하여 큰 성과를
얻었고, 1080년에 열린 아비뇽 교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중에
프랑스 그르노블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대사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로마(Roma)에서 교황으로부터
직접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주도면밀한 교구 개혁안을 수립하였는데, 성직매매와 고리대금업을
철저히 배격하였고, 성직자의 규율과 사제 독신제를 확립하는 한편 텅 빈
교구 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그 후 그는 세즈 디외(Chaise-Dieu) 수도원에서 베네딕토 회원이 되었으나,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7세(축일 ; 5월 25일)의 권고로 자기 교구로 돌아갔다.
그는 성 브루노(Bruno, 10월 6일)의 제자였기 때문에 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성 브르노의 카르투지오회가 크게 번창하는데 기여하였다.
성 후고는 1132년 4월 1일 자신의 교구에서 사망하였고,
113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후고(Hugo)는 프랑스 그르노블의 성 후고의 조카로서
막대한 재산을 포기하고 메지에르(Mezieres)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세속으로 돌아가고픈 유혹에 한동안 시달렸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성당에 들어가 빛과 도움을 간구하였다.
한번은 그가 제대 앞에서 눈을 들어 바라보니 성모님이 나타나셨고
또 조금 뒤에는 성자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훌륭한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그가 원장으로 부임하는 동안 본보 수도원은 크게 융성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선악을 쉽게 식별하였으며
자신의 모범이 출중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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