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3월18일 聖 살바토르, 聖 안셀무스님..등

H-Simon 2010. 3. 17. 17:22

 

 
3월18일(목)
聖 살바토르, 聖 안셀무스님..등
 

 

 

 

 

오르타의 성 살바토르(Salv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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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람>       **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나르치소 Narcissus 3월 18일 주교,순교자   +307년경
2 살바토르 ** Salvator 3월 18일 수사,증거자 오르타(Horta) 1520-1567년
3 안셀모** Anselm 3월 18일 주교 루카(Lucca) 1036-1086년
4 알렉산데르 Alexander 3월 18일 주교,순교자 예루살렘(Jerusalem) +251년
5 에두아르도 Edward 3월 18일 ,순교자 영국(UK) 962-978년
6 에우카르피오 Eucarpius 3월 18일 군인,순교자 니코메디아(Nicomedia) +304년
7 치릴로 ** Cyril 3월 18일 주교,교부,교회학자 예루살렘(Jerusalem) 315?-387년
8 크리스티아노 Christian 3월 18일 수도승,수도원장,주교 아일랜드(Ireland) +1186년
9 트로피모 Trophimus 3월 18일 군인,순교자 니코메디아(Nicomedia) +304년
10 펠릭스 Felix 3월 18일 부제,순교자   +307년경
11 프리그디아노** Frigdianus 3월 18일 주교 루카(Lucca) +588년?
총 11 성인

 

 

 

 

 

  ▶살바토르(3.18)
 
성인명 살바토르(Salvator)
축일 3월 1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증거자
활동지역 오르타(Horta)
활동연도 1520-1567년
같은이름 살바도르, 살바또르, 쌀바또르

 


   오르타의 성 살바토르는 에스파냐 헤로나 교구의

산타 콜룸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는 아기 때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거리를 헤매다가 바르셀로나에서 신기료장수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수도자가 되려는 열망으로

가득하여 작은 형제회 회원이 되고자 하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그는 처음에는 수도원 부엌일을

담당하였는데, 그의 덕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토르토사(Tortosa)의

예수 마리아 은둔소로 갔다.

여기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엄격한 생활을 하였는데, 맹인과 벙어리

그리고 불구자들이 그에게 오면 항상 치유를 받는 기적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는 항상 맨발로 다녔고, 매일 편태를 했으며,

길고 엄격한 단식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그는 특히 성모 마리아와 성 바오로에 대한 신심이 투철했으며,

수 차례에 걸쳐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다.

그는 47세의 일기로 선종하였으나, 생전에 이미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1606년 2월 5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8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살바도르로도 불린다.

 

  

 

 

 

   ▶안셀모(3.18)
 
성인명 안셀모(Anselm)
축일 3월 1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루카(Lucca)
활동연도 1036-1086년
같은이름 안셀름, 안셀무스, 안쎌모, 안쎌무스

 


   이탈리아 만투아 태생인 성 안셀무스는

삼촌인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 교황에 의하여

1073년 루카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안셀무스는 즉시 황제의 서임권 논쟁에 적극 가담하였고,

헨리 4세 황제가 주는 주교직의 상징 접수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그는 클루니악 수도원으로 은퇴해야 했고,

그곳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로부터 소환 받은 그는 엄격한 생활이 결여된

사람들을 조정하는 일을 보았다.

   1079년에 그는 카노사(Canossa)로 은퇴하여 마틸다 백작 부인의

영적 지도자로 지내면서 수도자 개혁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평신도 서임권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투쟁을

적극 지원하여 맹활약하였다.

그레고리우스의 사후 빅토르 3세가 그를 교황청 시찰자로 임명하여

롬바르디아의 여러 지역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는 만투아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성덕과 성서 지식 그리고 해박한 학식은 높이 평가받는다.

 

 

 

 

 

   ▶치릴로(3.18)
 
성인명 치릴로(Cyril)
축일 3월 1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교부, 교회학자
활동지역 예루살렘(Jerusalem)
활동연도 315?-387년
같은이름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315년경 예루살렘에서 로마 제국 황제 가문의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듯한 성 키릴루스는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으며,

342년 또는 그 후에 성 막시무스 2세(축일; 5월 5일)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성 키릴루스는 수년 동안 예비신자 교육에 전념하다가 350년 또는 351년에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막시무스 2세가 사망하자 그를 승계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대한 교계적인 관할권을 주장하던 카이사레아의

아리우스파 주교이던 아카키우스와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는 자신의

주교좌에서 해임되고 유배를 당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성 키릴루스가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여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 재산을 불법으로 매각했다는 누명을 쓴 성 키릴루스는

타르수스로 갔으나 359년 셀레우키아 주교회의에 의해 복직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재차 아카키우스의 음모에 의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축출되었다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다시 복직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성 키릴루스는 367년에 세 번째로 유배되었으나, 발렌스 황제가 율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에 유배된 모든 종교인들을 사면함으로써

석방되어 다시 주교좌로 돌아왔다.

   또 다음 해에는 안티오키아 공의회가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를 팔레스티나로 파견하여

그가 역설하던 ‘호모우시오스’로 인한 잡음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 용어는 니케아 신경의 기본 용어이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예루살렘 주교좌는 파벌주의와 아리우스주의로 뒤엉켜 있고

또 윤리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신앙과 그 주교좌는 올바르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후 성 키릴루스와 성 그레고리우스는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서 성 키릴루스는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주교로 인정받았다.

   사실 성 키릴루스는 성서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였으며,

347년의 사순절 동안 사용한 그의 “교리서”는 세례 준비자에게 명쾌한

교리 해설서가 되었으며, 4세기의 팔레스티나 전례를 자세히 보여주는

유명한 교리서였다.

역사가인 소크라테스와 소조멘은 성 키릴루스는 철저한 아리우스주의

 반대자였고, 그의 정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387년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난 그는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프리그디아노(3.18)
 
성인명 프리그디아노(Frigdianus)
축일 3월 1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루카(Lucca)
활동연도 +588년?
같은이름 프레디아노, 프리그디아누스

 

Madonna and Child with St Fredianus and St Augustine


   이탈리아에서 프레디아노라 불리는 성 프리그디아누스

북아일랜드 얼스터 지방 왕의 아들로서 아일랜드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순례하던 중에 루카를 지나다가 몬테 피사노의 은둔소에

마음이 이끌려 스스로 정착하였다.

그가 주교로 간택된 이유는 그의 높은 성덕 때문이었다.

교황 요한 2세까지 동원되어 은수생활을 중지하고 교회를 위해 더 많은

활동을 하도록 요구하였다고 한다.

7년 동안 평화스럽게 주교직을 수행하던 중에 랑고바르드족의 침략을 받고

주교좌가 불탔다. 그 후 그는 이를 재건하였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애정을 표시하였고, 남루한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고통 받는 이와 병자들을 직접 치료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은수생활을 잊은 적이 없었고 기회가 오면 즉시

돌아갈 자세로 살았다.

그는 성직자로 살았으나 생활은 은수자의 엄격한 생활이었다.

 

 성 그레고리우스의 “대화집” 속에는 그에 의한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임종이 다가 온 줄 알아차린 그는 주변에 있던 자기 수도자들을 불러서 함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마치 잠을 자는 듯 고요하게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