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년경 예루살렘에서 로마 제국 황제 가문의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듯한 성 키릴루스는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으며,
342년 또는 그 후에 성 막시무스 2세(축일; 5월 5일)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성 키릴루스는 수년 동안 예비신자 교육에 전념하다가 350년 또는 351년에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막시무스 2세가 사망하자 그를 승계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대한 교계적인 관할권을 주장하던 카이사레아의
아리우스파 주교이던 아카키우스와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는 자신의
주교좌에서 해임되고 유배를 당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성 키릴루스가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여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 재산을 불법으로 매각했다는 누명을 쓴 성 키릴루스는
타르수스로 갔으나 359년 셀레우키아 주교회의에 의해 복직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재차 아카키우스의 음모에 의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축출되었다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다시 복직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성 키릴루스는 367년에 세 번째로 유배되었으나, 발렌스 황제가 율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에 유배된 모든 종교인들을 사면함으로써
석방되어 다시 주교좌로 돌아왔다.
또 다음 해에는 안티오키아 공의회가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를 팔레스티나로 파견하여
그가 역설하던 ‘호모우시오스’로 인한 잡음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 용어는 니케아 신경의 기본 용어이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예루살렘 주교좌는 파벌주의와 아리우스주의로 뒤엉켜 있고
또 윤리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신앙과 그 주교좌는 올바르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후 성 키릴루스와 성 그레고리우스는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서 성 키릴루스는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주교로 인정받았다.
사실 성 키릴루스는 성서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였으며,
347년의 사순절 동안 사용한 그의 “교리서”는 세례 준비자에게 명쾌한
교리 해설서가 되었으며, 4세기의 팔레스티나 전례를 자세히 보여주는
유명한 교리서였다.
역사가인 소크라테스와 소조멘은 성 키릴루스는 철저한 아리우스주의
반대자였고, 그의 정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387년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난 그는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