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에우세비우스는 젊었을 때 로마(Roma)를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를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 두 사람의 친분은 날로 두터워졌으며 성 히에로니무스가
성지 여행을 제안했을 때 성 에우세비우스는 이를 기꺼이 수락하고
그를 수행하였다.
그들이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을 때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와
그녀의 딸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이 합류하였다.
베들레헴을 찾는 가난한 순례자들을 보고 성 히에로니무스가
그들에게 쉴만한 집을 지어달라고 청하자, 그들은 순례자의 집 건축기금
모금을 위하여 달마티아와 이탈리아까지 여행하였다.
또한 모금을 위해 크레모나에 있던 성 에우세비우스의 소유 재산과
로마에 있던 성녀 바울라의 재산도 모두 처분하였다.
로마에서 성 에우세비우스는 아퀼레아 일파의 사제인 루피누스와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는데, 루피누스는 오리게네스(Origenes)에 대하여
왜곡된 글을 만들고 그릇된 교리를 선전하던 자였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그의 가르침을 반박했고, 그의 제자인 성 에우세비우스도
스승을 따랐다.
그래서 루피누스는 성 에우세비우스를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400년경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 후 사망할 때까지 줄곧 이탈리아의 크레모나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전승에 의하면 그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서 영적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사망한 후 베들레헴에 묻힌 스승 성 히에로니무스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여러 주석서들은 성 에우세비우스에게 헌정되었고,
예수 탄생 성당의 제대 역시 성 에우세비우스에게 헌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성 에우세비우스가 에스파냐의 과달루페 수도원의 건립자이고,
그곳에 히에로니무스회를 진출시킨 장본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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