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2월 1일-*홍영주님 등 3위께서 당고개에서 순교하신 날*
H-Simon
2010. 1. 31. 14:21
2월 1일 (월)
*홍영주님 등 3위께서 당고개에서 순교하신 날*


카치니(Giulio Cac카치니(Giulio Cac
치니(Giu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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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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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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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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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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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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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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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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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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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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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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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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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02.01 |
홍영주 바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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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난 홍영주 바오로님은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의 여사울에서 자랐다.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이어받아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였고,
형 홍병주(洪秉周)베드로님과 함께 충청도 내포 지방의 회장으로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서양 신부들이 체포된 뒤 9월 말에 이르러
홍영주님은 형과 함께 서양 신부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죄로 체포되었다.
1840년 2월 1일, 하루 먼저 순교한 형 홍병주 베드로님을 따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3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시었다.
이문우 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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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으로도 불렸던 이문우 요한님은 경기도 이천(利川)의 양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5세 부모를 여의고 서울의 오 바르바라라는 여교우에게 입양되어
성장하였다.
독신으로 살아가고자 하였으나 양모의 뜻에 순종하여 혼인하였고,
몇 년 뒤 아내와 두 자녀가 세상을 떠나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고
범 주교를 도와 지방을 순회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자 사방에서 희사를 모아
옥에 갇힌 교우들을 돕고 박해 상황을 주교와 신부들에게 보고하던 중
11월 11일에 체포되었다.
(성인은 교우들을 데리고 새남터 형장으로 가서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의 시신을 모셔다
노고산에 안장하였고, 그 후 성인도 체포되었다.)
이 때에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심에 대답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며 오히려 당황하는 포졸들을 재촉하여 포청으로 갔다.
포청과 형조에서 모진 고문을 참아 낸 끝에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2명의 교우와 함께 31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시었다. |
최영이 바르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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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난 최영이는 어려서 아버지 최창흡님과 어머니 손소벽님의
모범을 따라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다가 20세 때 조신철과 혼인하여 아
들 하나를 두었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친정에 피신해 있다가 6월에 친정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어린 아들을 생각하는 모정으로 배교할까 두려워 아들을 친척에게 맡겼다.
남편이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 서적과 성물 때문에 포청에서 주리 두 차례,
태장 260대의 혹형을 당하였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형조에서도 세 차례의 형문을 이겨 냈다.
1840년 2월 1일 홍영주님, 이문우님과 함께 당고개에서
22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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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살 어린 아들을 남긴 채,
부 최창흡님, 모 손소벽님, 남편 조신철님
함께 모두 순교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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