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샹파뉴(Champagne)의 트루아(Troyes) 출신인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20세 때에 카르멜회, 클라라회에 차례로 입회를 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1652년에 그녀는 캐나다의 빌 마리에 정착중인 프랑스 관리가 자신의 식민지 내의 학교
선생을 원하자 그에 동의하고 1653년 퀘벡의 몬트리올(Montreal)에 도착하였다.
그 후 4년 동안 '비교회법적인 수련기'를 마친 그녀는 1658년에 개교한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는 점차 발전을 거듭하였고, 또 그녀는 '마리아회'를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활약하였지만
이로쿼이(Iroquois) 전쟁으로 인하여 잠시 귀국하였다.
그 후 재차 입국한 그녀는 가장 버림받고 가난한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1676년에는 노틀담 수녀회의 법적 설립이 퀘벡의 주교로부터 인가되었다.
그러나 1863년에는 수도원이 화재로 불탔으며 2명의 수녀를 잃는 비극이 있었고,
또 담당 주교와의 견해 차이가 심각해졌다.
그런 와중에서도 노틀담 수녀회는 괄목할만한 발전을 거듭하였다.
73세가 된 성녀 마르가리타는 건강과 기력이 점차 쇠하자 은퇴하여 여생을 지내다가
1700년 1월 12일에 선종하였다.
그녀는 1950년 시복되었고, 1982년 4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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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국왕 오스위의 궁중 관리이자 귀족 출신인
성 베네딕투스 비스코프(Benedictus Biscop, 또는 베네딕토)의 본래 이름은
비스코프 바두칭(Biscop Baducing)이었다.
그는 25세 되던 해에 궁중을 떠났다. 그는 653년에 로마(Roma)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성경 연구와 영적인 일에 헌신하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두 번째 로마 순례에서 돌아오던 어느 날 그는 프랑스의 레렝스(Lerins)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으며 2년을 그곳에서 지냈다.
세 번째로 로마를 순례했을 때 교황 성 비탈리아누스(Vitalianus, 1월 27일)가 마침 캔터베리의
신임 대주교로 선임된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9월 19일)를 수행토록 명하여
이를 성공리에 마쳤다.
성 테오도루스는 그를 캔터베리의 성 베드로(Petrus)와 성 바오로(Paulus)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고, 2년 후에 그는 성인들의 유해, 종교 예술품, 회화, 원고 등을 수집하기 위하여
로마로 귀향하였다.
674년에 그는 웨어(Wear) 강 입구에 수도원을 세워 성 베드로에게 봉헌하였다.
이 건물은 그 당시 영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공법으로 지었는데,
프랑스의 장인들이 지어 지금도 유명한 웨어머스(Wearmouth)의 성 베드로 수도원이 되었다.
그리고 682년에는 타인(Tyne) 강에서 6마일 거리에 두 번째 수도원을 짓고 성 바오로에게
봉헌하니 이곳이 재로(Jarrow)의 성 바오로 수도원이다.
그는 또 위의 두 수도원 수도자들에게 성무일도를 노래하고 그레고리안 성가를 익히도록
음악 전문가를 초빙하였다.
그의 지도하에 두 수도원은 학문과 로마 전례의 중심지로 변하게 되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3년을 중풍으로 침대 위에서 지내다가 1월 12일에 운명하였다.
그의 전기는 성 베다(Beda, 5월 25일)가 썼다. 그는 베네트 비스코프(Benet Biscop)로도 불린다. |
필리포 라티노(Filippo Latino)란 한 청년은 시칠리아(Sicilia) 섬의 코를레오네에서 신기료장수를
하던 사람인데, 그 후에는 시칠리아 최고의 검객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어떤 정치적인 분쟁에 뛰어들었다가 쫓기는 몸이 되자 성당의 성소로 은신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밖으로 나갈 입장이 못 되어서 성당에 머물다가 이런 생활을 계속하면 자기 영혼을
잃어버릴 것으로 단정하고, 1631년에 27세의 나이로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훌륭한 검객답게 수도생활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하여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그는 단식과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자세에서 특별히 뛰어났으나,
가끔 난폭한 검객의 기질 때문에 큰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차츰차츰 탈혼에 빠졌고, 공중에 떠오르는 체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병든 동물을 치유했는데, 그때부터 동물들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며
가끔 동물들을 위하여 주님의 기도를 함께 하기도 하였다.
성 베르나르두스 만큼 동물애호가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팔레르모(Palermo)에서
사망한 그는 1768년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1년 6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푸치(Antonius Maria Pucci, 또는 안토니오)는 이탈리아
피스토이아의 포지오네 출신으로 어느 가난한 농부의 일곱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고,
에우스타시우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마음이 유순하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던
그는 특히 본당 일에 열성이었다.
1837년 그는 피렌체(Firenze)에 있는 성모의 종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그때 안토니우스 마리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평수사이던 그는 매우 정직하고 모범적인
생활 태도로 말미암아 동료들 가운데서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관심사는 기도와 순종이었고 그 다음이 공부였다.
이윽고 그는 1843년에 사제가 되자 조그마한 어항인 비아레조(Viareggio)의 본당신부가 되어
일생을 그곳에서 지냈다.
주민들은 그를 '작은 거인'으로 불렀다. 그는 본당의 요구가 있으면 무슨 단체든지 조직하였지만,
항상 거룩한 사랑의 생활이란 목표를 뚜렷하게 심어주었고, 자신이 먼저 모범적인 삶을 보임으로써 신자들도 본받게 헸기 때문이었다.
1854년과 1866년 두 차례에 걸쳐 전염병이 돌았을 때 그의 사랑은 더욱 돋보였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직접 간호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어린이와 청년들의 교육을 위한 봉사대를
발족시켜 본당사목의 본보기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주민들의 사제'였다.
그는 1962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