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월11일(월) 聖 비탈리스, 聖 토마스님..등
H-Simon
2010. 1. 10. 15:44
1월11일(월)
聖 비탈리스, 聖 토마스님..등
성 비탈리스는 이스라엘 가자 지방에서 수도승으로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는 60세가 되었을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여행하고 그곳에서
매춘부들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 그는 독특한 방법으로 매춘부들을 도왔다.
즉 그는 매일 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저녁에 한 명의 매춘부를 불러 성행위 대신에
교리를 가르치고 기도하면서 그녀가 죄스런 생활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그의 방법 때문에 많은 반대와 논쟁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아무런 부정한 행동이
없음이 밝혀졌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한 매음굴에서 나오다가 한 남자로부터 머리를 얻어맞은 뒤
간신히 자신의 오두막에 돌아와 기도 중에 선종하였다. |
이탈리아 벨레트리(Velletri)의 코리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는 매우 가난한 집에서
자라났지만 자비심 많은 어느 사제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를 도와서 여러 가지 일을 도왔고 또 로만 캄파니아(Roman Campania)에서
양치는 일에 오랫동안 종사해야만 하였다.
그는 양치는 동안에 친구들과 잡담하는 대신 혼자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을 관조하며 묵상하였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기도와 관상하는 습관이 붙었다.
양친을 잃은 뒤 성 토마스는 22세의 나이로 코리에 있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6년 뒤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수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항상 한적한 곳을 찾아 그곳에서 관상생활에 몰두하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그는 허락을 받고 수비아코(Subiaco)와 인접한 치비텔라(Civitella)로 갔다.
그가 한 번은 성당에서 성체를 영하던 중에 탈혼에 빠져들었는데 성합을 손에 든 채로
천장까지 떠올라 잠시 있다가 밑으로 내려와서 형제들에게 성체를 영하여 준 적이 있었다.
또 그는 식탁에 놓인 빵을 모두 걸인들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에 그 공동체의 회원들이
식탁에서 빵을 모두 치우곤 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하였다.
"만일 마음이 기도하지 않으면, 혀는 헛수고만 할 뿐이다."
그는 199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된 후
1999년 11월 21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를 피해 일찍이 상(上) 이집트의 사막에서 은신처를 찾은
초기 이집트인 은수자인 성 팔레몬은 325년에 연로한 은수자로서
이집트의 타벤니시(Tabennisi)에서 사망하였다.
어느 날 성 팔레몬은 갓 군복무를 마친 성 파코미우스(Pachomius, 5월 9일)라는 청년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세상을 떠나 은둔생활을 하고 싶다고 청했으나,
성 팔레몬은 젊은 사람이 모든 것이 열악한 은둔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하여 거절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믿음과 주님의 도우심으로 강건하고 인내하리라는 용기있는
대답에 결국 성 팔레몬은 성 파코미우스를 제자이자 동료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쉼 없이 수련하며 은수자들의 공동체를 조직하는데도 함께 노력하였다.
그리고 후에 성 팔레몬은 성 파코미우스를 따라 타벤니시로 갔고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팔라몬(Palamon)으로도 불린다. |
아일랜드 북서부 코노트의 라오가에르 왕의 딸인 성녀 에테니아와 성녀 피델미아는
왕궁에서 유쾌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 날 왕궁 근처 개울에서 성 파트리키우스(Patricius, 3월 17일)와 그의 동료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다.
미사 중에 영성체를 한 후 너무나 행복해 하면서 천사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운명했다고 전해진다.
성녀 피델미아는 페델마(Fedelma)로도 불린다. |
성 히기누스에 대해서는 그리스 출신으로 교황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아마도 교황 성 텔레스포루스(Telesphorus, 1월 5일)를 계승하여 138-142년까지 재위한 듯
보인다.
그는 재위 기간에 영지주의자인 발렌티누스(Valentinus)와 케르도(Cerdo)와 논쟁을 벌여
정통신앙을 고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사제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세례 때 대부모를 세우는 관례를
도입하였다고 한다. 또한 순교자로 존경받고 있지만, 순교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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