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Sicilia)의 알리카타(Alicata) 태생인 성 요셉 마리아 톰마시의 부친은
팔레르모(Palermo)의 공작이었고 람페두사(Lampedusa) 섬의 왕자 칭호를 가진 분이었다.
요셉의 네 누이들은 부친이 팔마(Palma)에 세운 베네딕토 수녀원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소년 요셉은 이미 훌륭한 그리스어 학자였다.
또한 교회 음악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테아틴(Theatine)회 총장은
그의 재능을 높게 평가할 정도였다.
수도생활에 대한 꿈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때 마침 그의 어머니가 3회원이 되었고, 그의 부친도 비슷한 결정을 함에 따라
그의 앞길을 막던 장애물이 걷혔다.
그는 1664년에 팔레르모에서 테아틴회의 수련자로 출발하여 서원한 뒤 메시나로 가서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그 다음에 로마로 가서 페라라와 모데나대학을다녔고,
1673년에는 나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거의 기도와 학문연구에 바친 은수자의 생활이었다.
그는 그리스 철학, 성서 그리고 특히 성무일도를 연구하였다.
그의 재능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히브리어 교사이던 랍비 모세 다 케이브가 유대교에서
개종까지 하였다.
그의 첫 저술은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거울"이며,
1680년에는 고대의 전례를 서술한 "코디체스 사크라멘토룸"(Codices Sacramentorum)을 냈고,
"시편"은 주세페 카로(J. M. Carus)라는 필명으로 냈다. 1697년
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에게 순종하는 뜻으로 바티칸으로 들어갔고,
1704년에는 바티칸의 신학자로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단순한 생활을 했고 동료들과 함께 성가를 불렀다.
음식도 늘 초라하였다. 그래서 그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이었다.
미사를 드리는 그를 보고 그에게 특은이 내렸음을 누구나 인정하였고,
피조물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는데, 공교롭게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가 12월에
중병에 들자 그는 "교황은 회복되고 내가 곧 죽을 것"이라 하였다.
그는 1713년 1월 1일에 선종하였다. 그는 1803년 시복되었으며
198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