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월1일(금-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 聖오딜로, 聖폴젠시오님..등

H-Simon 2009. 12. 31. 16:47

 

 
1월1일(금-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 
           聖오딜로, 聖폴젠시오님..등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그레고리오  Gregory 1월 1일 주교 나지안주스(Nazianzus) +374년
2 마뇨 Magnus 1월 1일 순교자   +연대미상
3 미드윈 Mydwyn 1월 1일 평신도   +2세기
4 바실리오 Basil 1월 1일 주교 엑스(Aix) +521년
5 베드로 Peter 1월 1일 수도원장 아트로아(Atroa) 773-837년
6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 Vincent Mary Strambi 1월 1일 주교 마체라타(Macerata) 1745-1824년
7 빌리암 William 1월 1일 수도원장 디종(Dijon) 962-1031년
8 알마치오 Almachius 1월 1일 순교자   +400년경
9 에우젠도** Eugendus 1월 1일 수도원장 콘다트(Condat) +510년경
10 성녀 에우프로시나** Euphrosyne 1월 1일 동정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5세기경
11 엘반 Elvan 1월 1일 평신도   +2세기
12 오딜로 ** Odilo 1월 1일 수도원장 클뤼니(Cluny) 961/962-1049년
13 Joseph Mary Tommasi 1월 1일 추기경   1649-1713년
14 복자 우골리노 Hugolinus 1월 1일 수사 괄도(Gualdo) +1260년
15 유스티노 Justin 1월 1일 주교 키에티(Chieti) +540년
16 성녀 츠디슬라바** Zdislava 1월 1일 부인,3회원   1215-1252년
17 성녀 콘나타 Connat 1월 1일 수녀원장 킬데어(Kildare) +590년
18 콘코르디오 Concordius 1월 1일 신부,순교자   +178년경
19 클라로 Clarus 1월 1일 수도원장   +660년경
20 성녀 판체아 Fanchea 1월 1일 수녀원장 로소리(Rossory) +530년경
21 펠릭스 Felix 1월 1일 주교 부르주(Bourges) +580년경
22 풀젠시오 ** Fulgentius 1월 1일 주교,증거자 루스페(Ruspe) 467-533년
총 22 성인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1.1)
 
성인명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Vincent Mary Strambi)
축일 1월 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마체라타(Macerata)
활동연도 1745-1824년
같은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성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는 이탈리아의 치비타베키아에서 어느 약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주 짓궂게 장난치는 아이였지만, 맨발이거나 혹은 남루한 옷을 입은 부랑아를 보면
자기의 외투와 신발조차 벗어주는 갸륵한 소년이었다.
그는 교구사제가 될 마음으로 공부했으나 서품 직전에 십자가의 성 바오로(Paulus, 10월 19일)의
영향을 받고 예수 고난회원이 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극심하던 부모의 반대를 이기고 마침내 수련을 받게 되었다.

   그는 수도원 내의 여러 직책을 맡았고 1781년에 관구장이 되었으며,
또 1801년에는 자신이 극구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체라타와 톨렌티노(Tolentino)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불굴의 노력은 이탈리아 전역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놀라운 쇄신을 불러일으키는 주교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808년 그는 나폴레옹의 정책에 반대하여 추방되었으나, 1813년 나폴레옹이 실각함으로써
교구로 돌아왔다. 교황 비오 7세서거 때에 그도 역시 사임하였으나,
그의 열렬한 친구이던 레오 12세의 등극과 더불어 그는 교황의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이 모든 직책에서도 그는 수도생활의 정신을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복녀 안나 마리아 타이기(Anna Maria Taigi, 6월 9일)가 예언한 12월 31일에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셨고, 1824년 1월 1일 79살의 생일날에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그는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에우젠도(1.1)
 
성인명 에우젠도(Eugendus)
축일 1월 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활동지역 콘다트(Condat)
활동연도 +510년경
같은이름 에우겐도, 에우겐두스, 에우젠두스, 오이엔도
 

   성 로마누스(Romanus, 2월 28일)와 그의 제자인 성 루피키누스(Lupicinus, 3월 21일)가
서거한 뒤 이 두 성인이 스위스 제네바 인근에 세운 콘다트 수도원은 일곱 살 때부터 교육을
받아온 성 에우겐두스가 원장인 미나우시오를 도와서 지도하고 있었다.
성 에우겐두스의 생활은 다른 수도자들의 입에서도 너무 엄격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분노하는 행동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무던히 애썼다.
그래서 그의 성격은 항상 온화하였지만 결코 웃는 법이 없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및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그는 실로 학문의 대가였다. 그가 콘다트의 원장으로 재직할 때 불타버린 이 수도원을
돌로 재건하였고, 또 성 베드로(Petrus)와 성 바오로(Paulus) 및 성 안드레아(Andreas)에게
봉헌된 성당도 재건하였다.
그의 기도는 거의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그의 불타는 열성은 임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61세가 되어 운명하자 콘다트 대수도원은 에우겐두스 성인의 이름을 따서
생오이엥(Saint-Oyend)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오이엔도(Oyend)로도 불리기 때문이다.
 
 
 
 
 
   ▶에우프로시나(1.1)
 
성인명 에우프로시나(Euphrosyne)
축일 1월 1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녀
활동지역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연도 +5세기경
같은이름 에우쁘로시나, 에우프로쉬네, 에우프로시네, 에우프로씨나, 에우프로씨네, 유쁘로시나, 유프라서니, 유프로시나

 


   성녀 에우프로시나(Euphrosyna)는 알렉산드리아의 부자이던 파프누티우스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다가 얻은 딸이므로 그녀를 일찍 결혼시키기 위하여 어느 부자 집
아들과 미리 약혼을 해 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봉헌생활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항상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하며
생활하였다.
한 번은 그녀의 부친이 출타했을 때 그녀가 태어나도록 늘 기도를 해왔던
어느 늙은 수도자가 찾아와서 그녀에게 수도복을 입혔다.

   그러나 그녀는 부친의 불같은 성화를 이길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남장을 하고 또
남자 수도복을 입고서 그녀의 부친이 자주 찾아가는 수도원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녀는 스마라그두스(Smaragdus)라 불렸으며,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는
그 시대에 상당히 유명했다.
그녀의 부친도 딸에게서 영적 지도를 자주 받았으나 스마라그두스 수사가
자기 딸인 줄은 몰랐다고 한다. 이윽고 그녀가 운명할 즈음에 부친에게
자기의 신원을 밝혔다.
이에 감동한 그녀의 부친은 곧 수도자가 되어서 딸이 살던 수도원 방에서
10년을 살다가 하느님 품에 안겼다.
 
 
 
 
 
 
  ▶오딜로(1.1)
 
성인명 오딜로(Odilo)
축일 1월 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활동지역 클뤼니(Cluny)
활동연도 961/962-1049년
같은이름  
 

   성 오딜로는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에서 귀족인 메르쾨르가문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브리우드(Brioude)의 성 율리아누스 신학교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991년경에 클뤼니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는 993년 제4대 수도원 원장인 성 마욜루스(Majolus, 5월 11일)의 비서로 일하다가,
994년 5월 11일 제5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인자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지닌 그는 동시에 뛰어난 조직력과 지도력과 통솔력을 발휘하여
클뤼니 공동체의 수를 크게 확장시키는 동시에 하나로 통합시켜 클뤼니 연합회를 체계적으로
정립시켰다.

   1030-1031년에 성 오딜로는 자신의 수도원과 소속 모든 회원들이 함께 기념할 축일로
'모든 성인의 날'(11월 2일, 오늘날의 위령의 날)을 택하였다.
이 기념일은 후에 교회 전례력에 정식으로 수록되었다.
1041년에 성 오딜로는 수도원 내에서 수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일체의 싸움을 중지하도록
'신의 휴전'(Treuga Dei)을 확대시켜 적용하였다.
또 성당에 피신처를 구한 사람을 체포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언제나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1033년에 대기근이 일어나자
수도원 소유의 재물을 팔아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성 오딜로는 이러한 모든 일을 통하여 내외적으로 클뤼니 수도원의 기틀을 마련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새롭고 웅장한 수도원 건물들을 짓는 데 헌신하였으며,
클뤼니 수도회가 에스파냐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또 어려서부터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깊었던 그는 육화에 있어서
동정녀의 역할과 성모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이 지닌 특권을 역설하였다.
그는 1049년 수비니(Souvigny)의 수도원을 방문하였다가 사망하여 그곳에 안치되었다.
그는 1063년에 시성되었다.
 
 
 
 
 
   ▶요셉 마리아 톰마시(1.1)
 
성인명 요셉 마리아 톰마시(Joseph Mary Tommasi)
축일 1월 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추기경
활동지역  
활동연도 1649-1713년
같은이름 똠마시, 요세푸스, 요제프, 조셉, 주세페, 쥬세페

 


   시칠리아(Sicilia)의 알리카타(Alicata) 태생인 성 요셉 마리아 톰마시의 부친은
팔레르모(Palermo)의 공작이었고 람페두사(Lampedusa) 섬의 왕자 칭호를 가진 분이었다.
요셉의 네 누이들은 부친이 팔마(Palma)에 세운 베네딕토 수녀원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소년 요셉은 이미 훌륭한 그리스어 학자였다.
또한 교회 음악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테아틴(Theatine)회 총장은
그의 재능을 높게 평가할 정도였다.

   수도생활에 대한 꿈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때 마침 그의 어머니가 3회원이 되었고, 그의 부친도 비슷한 결정을 함에 따라
그의 앞길을 막던 장애물이 걷혔다.
그는 1664년에 팔레르모에서 테아틴회의 수련자로 출발하여 서원한 뒤 메시나로 가서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그 다음에 로마로 가서 페라라와 모데나대학을다녔고,
1673년에는 나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거의 기도와 학문연구에 바친 은수자의 생활이었다.
그는 그리스 철학, 성서 그리고 특히 성무일도를 연구하였다.
그의 재능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히브리어 교사이던 랍비 모세 다 케이브가 유대교에서
개종까지 하였다.
그의 첫 저술은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거울"이며,
1680년에는 고대의 전례를 서술한 "코디체스 사크라멘토룸"(Codices Sacramentorum)을 냈고,
"시편"은 주세페 카로(J. M. Carus)라는 필명으로 냈다. 1697년
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에게 순종하는 뜻으로 바티칸으로 들어갔고,
1704년에는 바티칸의 신학자로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단순한 생활을 했고 동료들과 함께 성가를 불렀다.
음식도 늘 초라하였다. 그래서 그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이었다.
미사를 드리는 그를 보고 그에게 특은이 내렸음을 누구나 인정하였고,
피조물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는데, 공교롭게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가 12월에
중병에 들자 그는 "교황은 회복되고 내가 곧 죽을 것"이라 하였다.
그는 1713년 1월 1일에 선종하였다. 그는 1803년 시복되었으며
198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츠디슬라바(1.1)
 
성인명 츠디슬라바(Zdislava)
축일 1월 1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부인, 3회원
활동지역  
활동연도 1215-1252년
같은이름 지디슬라바, 지슬라바, 치디슬라바
 

   보헤미아의 리토메리치교구 출신인 성녀 츠디슬라바는 불과 일곱 살의 나이에
인근의 숲 속으로 들어가서 기도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돌아오곤 하였으나 그녀의 고집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부모는 일찍이 그녀를 어느 귀족과 결혼시켰고,
그녀는 네 자녀를 두었으나 남편은 어린 아내를 항상 잔인하게 다루었다.
그녀는 항상 남편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또 가난한 사람들의 대모로서 자선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타타르족이 침입하여 그들의 머무는 가벨 성이 함락되었을 때 남편이
어느 걸인을 침대에 재운 적이 있었는데, 이 걸인이 곧 그리스도의 발현이었다.
 이에 크게 감명을 받은 남편은 그 길로 아내를 도미니코회의 3회원이 되게 하였다.
그녀는 자주 탈혼에 빠졌고 매일같이 성체를 모셨다.
그녀는 도미니코회의 초대 3회원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는 1907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공경이 허용된 후,
1995년 5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풀젠시오(1.1)
 
성인명 풀젠시오(Fulgentius)
축일 1월 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증거자
활동지역 루스페(Ruspe)
활동연도 467-533년
같은이름 풀겐티오, 풀겐티우스, 풀젠시우스, 풀젠티오, 풀젠티우스

 


   카르타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파비우스 클라우디우스 고르디아누스 풀겐티우스는
어머니가 과부가 되면서부터 가문의 영지를 관리하였는데,
그의 탁월한 능력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훌륭한 교육을 받았던 그는 카르타고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으나 2년 후에 사임하면서부터
정통파 주교인 파우스투스(Faustus)가 지도하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507년 그는 루스페(오늘날 튀니지의 쿠디아트 로스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는 아리우스파(Arianism)인 반달족(Vandals)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파 주교들이 사르데냐(Sardegna) 섬으로 추방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그런대로
교구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사르데냐 섬의 칼리아리(Cagliari)에 유배된 동안에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반달족의 왕인 트라시문드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왕은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아리우스파 성직자와의 토론회를 주선하였으나
풀겐티우스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518년에 사르데냐 섬으로 다시 추방해버렸다.

   그 후 왕의 후계자인 힐데릭이 귀향을 허가하여 정상적으로 집무하였는데,
그의 재임 기간 대부분은 유배생활로 보냈다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신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의 이름만 들어도 아리우스파 성직자들은 겁을 내었다.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배격하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사목자였다.
그 후 그는 시르시니아섬에 있는 수도원으로 은거하였다가 루스페로 돌아온 얼마 뒤에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