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2월23일(수) 聖女마리아 마르가리타 두바유, 聖요한司祭님..등

H-Simon 2009. 12. 22. 15:25

 

 
12월23일(수) 
聖女마리아 마르가리타 두바유, 聖요한司祭님..등

                   

          

                    사랑하는 예수님,

                    저희가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 찾아 오시는

                    님에게 소홀함이 없도록, 

                    저희 마음의 눈을 맑게  해 주옵소서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팍토르**
Nicholas Factor 12월 23일 수사   1520-1583년
2 다고베르트 2세 Dagobert II 12월 23일 ,순교자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 +679년
3 레오메네 Leomenes 12월 23일 순교자 크레타(Creta) +250년
4 마르도니오 Mardonius 12월 23일 순교자   +303년
5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 두비유** Mary Margaret d'Youville 12월 23일 과부,설립자 캐나다(Canada) 1701-1771년
6 미그도니오 Migdonius 12월 23일 순교자   +303년
7 바실리데  Basilides 12월 23일 순교자 크레타(Creta) +250년
8 성녀 빅토리아 ** Victoria 12월 23일 동정 순교자   +250년경
9 사투르니노  Saturninus 12월 23일 순교자 크레타(Creta) +250년
10 세르불로 ** Servulus 12월 23일 불구자   +590년경
11 아가토포  Agathopus 12월 23일 순교자 크레타(Creta) +250년
12 성녀 아나톨리아☞8 Anatolia 12월 23일 동정 순교자   +250년경
13 에바리스토  Evaristus 12월 23일 순교자 크레타(Creta) +250년
14 에우니치아노  Eunician 12월 23일 순교자 크레타(Creta) +250년
15 에우포로  Euporus 12월 23일 순교자 크레타(Creta) +250년
16 요한 칸시오** John Cantius 12월 23일 신부,성서학자 켕티(Kenty) 1390-1473년
17 제시코  Zeticus 12월 23일 순교자 크레타(Creta) +250년
18 젤라시오  Gelasius 12월 23일 순교자 크레타(Creta) +250년
19 테오둘로  Theodulus 12월 23일 순교자 크레타(Creta) +250년
20 토르락 Thorlac 12월 23일 주교 아이슬란드(Iceland) 1133-1193년
21 복자 하르트만  Hartmann 12월 23일 주교 브릭센(Brixen) +1164년
총 21 성인

                   

 

 

 

 

   ▶니콜라오 팍토르(12.23)
 
성인명 니콜라오 팍토르(Nicholas Factor)
축일 12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1520-1583년
같은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팍토르
 

   성 니콜라우스의 부친은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살고 결혼하였지만,
사실은 시칠리아(Sicilia) 태생의 양복 기술자였다.
그의 아들 베드로 니콜라우스는 신심이 깊고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으나,
15세 되던 해에 그의 부친은 아들 역시 양복 일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니콜라우스는 수도생활의 성소를 인식했기 때문에 부친의 동의를 얻어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수도원 안에서 급성장하였고, 수차례에 걸쳐 해외 선교를 요청하였으나,
그에게는 무어인의 개종 업무만 주어졌다. 만년에 그는 카푸친회로 이적했지만 불과
몇 달 뒤에 되돌아왔다. 이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참으로 거룩한 이 사람들을 떠날 수 없어…”
그는 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꼭 보속을 한번 하였고, 설교 전에는 세 번씩 육체적인
고행을 하였다. 탈혼, 기적 그리고 환시는 그에게 흔한 일이라 할 정도로 많았다.

   성 루도비쿠스 베르트란두스(Ludovicus Bertrandus, 10월 9일)는 그를 '지상과 천국에서 동시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또 그는 에스파냐 국왕인 필립 2세의 극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와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며,
신적 사랑이 너무나 뜨거워서 찬물도 곧 더운 물로 변화시킬 정도였다고 흔히들 말을 한다.
그러나 사탄이 사자, 곰, 뱀 같은 행태로 그에게 공격한 사례들도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 마르가리타 두비유(12.23)
 
성인명 마리아 마르가리타 두비유(Mary Margaret d'Youville)
축일 12월 23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과부, 설립자
활동지역 캐나다(Canada)
활동연도 1701-1771년
같은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따, 말가리타, 메리, 미리암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 두비유는 1701년 10월 15일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 교외 바렌에서
태어나 캐나다 사람으로는 처음 시성된 인물이다.
그녀는 크리스토프 뒤프로스트 드 라제므레와 마리 르네 골티에 사이의 여섯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극심한 가난 속에서 고생하던
그녀는 증조부인 피에르 부셰(Pierre Boucher)의 영향으로 퀘벡의 우르술라회에서 2년을 더
공부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어머니의 둘도 없는 협조자로서 동생들의 교육을
도맡게 되었다.

   1722년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프랑수아 두비유와 결혼을 하고 시댁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큰 고통이었다.
남편이 가정을 꾸려 나가는 데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잦은 외박과 인디언과의 불법 주류 거래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
남편이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이미 그녀는 여섯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결국 1730년 29살의 나이로 남편을 잃은 그녀는 절망적인 가난을 경험하게 되었고,
여섯 명의 자녀 중 네 명이 유아 때 사망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런 모든 일 중에서도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키워나갔고,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부드러운
사랑을 더욱 깊이 경험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모든 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는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많은 자선 사업을 하였다.
훗날 사제가 된 두 명의 아들을 교육하고 눈먼 여성을 집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얼마 가지 않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함께 나눌
세 명의 젊은 여성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1737년 12월 31일 그들은 하느님께 서원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래서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몬트리올의 애덕의 수녀회,
일명 ‘회색 수녀회’의 설립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위해 사회의 관습과 싸웠다.
자신의 친척과 이웃들에게 받는 조롱과 비웃음에도 당당하게 맞섰다.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힘쓰던 중 공동체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고 동료 중 한 명의 죽음을 경험하며 건강이 크게 나빠지기도 했지만 그 모든 일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그녀의 신심을 더 깊게 만들었다.
1745년 2월 2일 그녀와 초창기 두 명의 동료들은 공동으로 소유한 것들을 저당 잡혀서
2년 후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던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다 쓰러져가던 몬트리올의
한 병원을 맡아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래서 그녀와 동료 수도자들은 그 병원을 재건하여 가장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는데 사용하였다.
동료 수녀들과 평신도 협력자들의 도움으로 그녀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재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1765년 발생한 화재로 병원이 파괴하였지만 그녀의 신앙과 용기마저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동료 수녀들과 병원에서 지내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앙 안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고 찬미 드리기를 요청하였다.
64살의 나이에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쉼터의 재건을 맡았다. 인생 전체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준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결국 지친 몸을 이끌고
1771년 12월 23일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한 사랑하는 어머니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비록 한 명의 여성이었지만 그녀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던
탁월한 노력은 널리 그리고 멀리 퍼져나갔다.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는 캐나타 전역은
물론 미국과 남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는 1959년 5월 3일에 그녀를 복자품에 올리면서 사랑과 연민으로
모든 이에게 다가가는 수녀회의 사명에 걸맞게 그녀에게 ‘보편적 애덕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그녀는 많은 고아들과 미래를 걱정하는 청소년들, 희망 없이 살며 환멸을 느낀 소녀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과 미망인들의 고통스럽고 불행한 환경에 큰 위로를 주었다.
또한 그녀는 다른 이들을 돕는데 자신의 삶을 봉헌한 이들에게 더욱 자비로운 정신으로 다가갔다.
결국 그녀는 1990년 12월 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빅토리아(12.23)
 
성인명 빅토리아(Victoria)
축일 12월 23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250년경
같은이름 빅또리아
 

   역사적인 근거는 희박하지만 “성녀 빅토리아와 성녀 아나톨리아(Anatolia)의 수난기”의 내용에
의하면 두 성녀가 실존하였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수난기에 의하면 성녀 아나톨리아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동정을 지키기 위하여
아우렐리우스(Aurelius)라는 청년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 청년은 자매인 성녀 빅토리아에게 그녀를 설득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동정에 대한 성녀 아타톨리아의 신앙에 감동한 성녀 빅토리아마저 자신의 약혼자인
에우게니우스(Eugenius)와 파혼을 하고 말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두 청혼자들은 두 자매를 감금하고 자신들에게 복종할 때까지 굶겼지만,
끝내 두 자매가 뜻을 굽히지 않자 그들을 신자라고 고발하여 결국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두 자매는 12월 23일에 오늘날의 몬테레오네인 트레불라 무투에스카에서
데키우스 황제 때에 순교하였다고 한다.
두 성녀에 대한 공경 예식은 일찍부터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두루 퍼졌다.
 
☞ 12 번..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세르불로(12.23)
 
성인명 세르불로(Servulus)
축일 12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불구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590년경
같은이름 세르불루스, 쎄르불로, 쎄르불루스

 


   성 세르불루스(또는 세르불로)는 어릴 때부터 수족이 마비된 걸인이었다.
그는 똑바로 서거나 손을 입에까지 가져갈 수도 없었고, 혼자서 이쪽저쪽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반신불수였다.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를 로마(Roma)의 성 클레멘스(Clemens) 성당 문 앞에 놓아두고
애긍을 청하여 먹고살게 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성경을 한 권 구입하였다.
 읽을 줄 모르는 그는 주의 깊게 성경을 응시함으로써 마음으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찬미가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가를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에게 희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찬미가나 시편을 노래로 들려준 것이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천국에서 들리는 이상한 음악’으로 들었다고 한다.

   그 후 그가 임종하고 그의 유해는 성 클레멘스 성당에 안장되었는데,
연일 기적이 일어났다.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는 성 세르불루스야말로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이며, 불구의 몸으로 그토록 아름다운 찬미가를 노래한 하느님 예찬자로서 높이 공경하였다.
 
 
 
 
 
   ▶요한 칸시오(12.23)
 
성인명 요한 칸시오(John Cantius)
축일 12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성서학자
활동지역 켕티(Kenty)
활동연도 1390-1473년
같은이름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칸시우스, 칸티오, 칸티우스

                                         


   성 요한 칸티우스는 1390년 6월 23일 폴란드 슐레지엔 지방의 켕티에서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형편인 아버지 스타니슬라우스와 어머니 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한은 태어난 마을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고 1413년 크라쿠프(Krakow) 대학에 입학하여
1417년에 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그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1439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모교에서 성서 강의를 맡았다.
1443년경에 그는 터키에서 순교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예루살렘을 순례했으며,
네 차례에 걸쳐 로마(Roma)를 걸어서 순례하였다.

   그는 설교로 매우 유명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비해 명성이 너무 높아
그만큼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
올쿠스즈의 본당사제로 봉직하게 되었다.
영혼들을 돌보는 사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는 재차 크라쿠프 대학의 성서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운명할 때까지 평생 동안 대학에서 성서학을 가르치면서 16권의 방대한 강의록을 남겼다.
또한 그는 위대한 신앙인으로 처신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과 교수 그리고 생활의 엄격성은
물론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증거하며 살았다.

   켕티의 요한은 1690년 시복되었으며, 1737년에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1767년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크라쿠프(Krakow)의 성 안나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