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2월9일(수) 聖 후안 디에고님..등

H-Simon 2009. 12. 8. 13:02

 

 
12월9일(수) 聖 후안 디에고님..등

                  

          

                    사랑하는 예수님,

                    대림절, 

                    저희가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 찾아 오시는

                    당신에게 소홀함이 없도록, 

                    저희 마음의 눈을 맑게  해 주옵소서,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성녀 고르고니아 Gorgonia 12월 9일 증거자   +372년경
2 복녀 델피나 ** Delphina 12월 9일 3회원   1285?-1360년
3 레스티투토 Restitutus 12월 9일 주교 카르타고(Carthago) +연대미상
4 성녀 레오카디아  Leocadia 12월 9일 동정 순교자 톨레도(Toledo) +304년?
5 바시아노 Bassian 12월 9일 순교자   +연대미상
6 성녀 발레리아 Valeria 12월 9일 동정 순교자   +연대미상
7 베드로 Peter 12월 9일 순교자   +연대미상
8 베드로 푸리에** Peter Fourier 12월 9일 신부,설립자   1565-1640년
9 부독 Budoc 12월 9일 주교 돌(Dol) +7세기
10 수체소 Successus 12월 9일 순교자   +연대미상
11 시로 Syrus 12월 9일 주교 파비아(Pavia) +1세기경?
12 요한 로버츠 John Roberts 12월 9일 순교자 영국(UK) 1577-1610년
13 율리아노 Julian 12월 9일 주교 아파메아(Apamea) +3세기
14 치프리아노 Cyprian 12월 9일 은수자   +586년
15 프로쿨로 Proculus 12월 9일 주교,증거자 베로나(Verona) +320년
16 프리미시보 Primitivus 12월 9일 순교자   +연대미상
17 필로테오 Philotheus 12월 9일 순교자   +297년
18 후안 디에고** Juan Diego 12월 9일 농부 쿠아우티틀란(Cuautlitlan) 1474-1548년
19 히파르코 Hipparchus 12월 9일 순교자   +297년
총 19 성인

 

 

 

  ▶델피나(12.9)
 
성인명 델피나(Delphina)
축일 12월 9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3회원
활동지역  
활동연도 1285?-1360년
같은이름 델삐나

 


   사브랑(Sabran)의 성 엘제아리우스(Elzearius, 9월 27일)는 프로방스 지방 앙주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로비앙의 부친 성에서 태어났고, 모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마르세유의
성 빅토르(Victor) 수도원의 원장인 사브랑의 빌리암으로부터 교육받고 성장하였다.
수도원장은 그의 아저씨였는데 매우 엄격한 교육을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는 영적 지도자의 영향을 받아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고,
1299년에 소유권 및 정치적인 입지를 고려해서 같은 프로방스의 귀족 가문의 딸인
델피나와 결혼하였다.
알프스맥 저지대에 위치한 퓌미셸(Puimichel) 성에서 태어난 델피나는 당시 15세였다.
이들 부부는 처음에는 앙주이에서 살다가, 곧 퓌미셸 성으로 옮겨 와 살았다.
그들은 서로에 대하여 지극한 신뢰와 사랑을 지녔으며, 델피나는 남편을 따라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다.
또한 신심이 두터웠던 그들은 서로 합의하에 동정을 지키기로 서약하였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이 거룩한 부부는 관상과 기도를 중심으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선행과 애덕 실천에서 남다른 모범을 보이며 삶으로써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성 엘제아리우스는 매일같이 성무일도를 바쳤다.
그의 나이 23세 때에 부친의 명예와 유산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이에 따르는 온갖 위험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열렬한 신심과 지혜로써 세속적인 재물을 다스렸다.
또한 그는 국왕의 부름을 받고 궁중의 일을 돌보기도 하였는데, 왕의 부탁으로 파리(Paris)에
대사로 갔다가 중병을 얻어 1323년 9월 27일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에 그는 즉시 총고백을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매일 묵상함으로써 온갖 고통을
이겨냈다.
노자성체를 영하면서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나의 희망 전부였다.”
그는 자신의 고해신부인 어느 작은 형제회 회원의 팔에 안겨 영광된 삶을 마쳤다.

   1309년경에 그는 자신의 조카인 그리모아드의 빌리암의 대부를 섰는데,
빌리암은 나중에 우르바누스 5세 교황이 되었고,
1369년 4월 15일 자신의 대부인 엘제아리우스를 시성하였다.
한편 델피나는 남편과 사별한 뒤 37년을 더 살았는데, 그녀는 그 동안에 나폴리의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수녀가 된 나폴리 여왕 산치아(Sanchia)와 함께 죽을 때까지
수녀원에서 살았다. 그녀와 여왕은 절친한 사이였다.
델피나는 대부분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많은 자선을 베푸는 등 은수자처럼
생활하다가 1360년에 사망하였다.
델피나는 1363년부터 시성 절차가 진행되었으나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1791년 델피나의 유해는 앱트(Apt)에 있는 작은 형제회 성당에 남편의 유해와 나란히 안치되었다.

 
 
 
 
 
 
   ▶베드로 푸리에(12.9)
 
성인명 베드로 푸리에(Peter Fourier)
축일 12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565-1640년
같은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프랑스 로렌의 미르쿠르에서 태어난 성 베드로 푸리에(Petrus Fourier)는 15세 때에
퐁타무송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 입회하여 공부하였고, 그 후 20세경에 쇼무지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였다. 1589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에도 학업을 계속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함과 동시에 그곳의 수도원 본당 일을 맡았다.
1597년 그는 거의 폐허가 된 마탱쿠르(Mattaincourt) 본당의 주임신부로 파견되었는데,
교우들과 동고동락하며 30년을 살았다. 이때 그는 칼뱅파와 수없이 싸워야 했다.
그는 단순하고 엄격한 생활을 하여 존경을 받았고, 여러 개의 신심단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어린이 교육을 지원하여, 그야말로 그 지역의 목자로서 추앙을 받았다.

   그는 4명의 여성 봉사자와 함께 무료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1598년에는
하나의 수녀회가 설립되고, 1616년에는 '성모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녀회'라는 이름으로
교황청의 인가를 받았다. 1622년 투르(Tours)의 주교가 그의 수도회를 개혁하고 하나의 단체로
통합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므로, 다음 해에 그는 뤼네빌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아야만 하였다.
1629년 로렌의 수도회는 구세주회와 통합되었고, 베드로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그는 루이 13세에게 충성서약을 거부하고 프랑슈콩테의 그레이로 피신하여
만년을 지내야만 하였다. 그는 1730년 1월 20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897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후안 디에고(12.9)
 
성인명 후안 디에고(Juan Diego)
축일 12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농부
활동지역 쿠아우티틀란(Cuautlitlan)
활동연도 1474-1548년
같은이름 디다꼬, 디다꾸스, 디다코, 디다쿠스, 요안네스, 요한,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성 요한 디다쿠스(Joannes Didacus, 또는 요한 디다코, 후안 디에고)는
1474년 오늘날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의 일부인 쿠아우티틀란에서 태어나
‘독수리 같이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쿠아틀라토아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아나후악 계곡에서 비교적 문화적으로 성숙한 치치메카족의 일원이었다.
평범한 농부였던 그는 50세경에 초기 멕시코 선교를 나온 작은 형제회 베드로 다 간드 신부로부터
요한 디다쿠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후 날이 갈수록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그는 에스파냐가 마야,
아즈텍 문명이 융성하던 멕시코를 정복한 지 꼭 10년 후인 1531년 12월 9일 멕시코시티 근방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원 성당의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테페약 산을 넘고 있었다.
그날따라 이른 새벽 가시덤불밖에 없던 산 정상에 신비한 기운이 감돌았는데 갑자기 찬란한
빛을 내는 구름 속에서 한 귀부인이 나타나 성 요한 디다쿠스를 불렀다.
그때 그 귀부인은 자신이 은총을 가득히 입은 동정녀 마리아임을 밝히면서 그 장소에
성당을 세우라는 메시지를 주교에게 알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들은 멕시코의 초대주교인 후안 데 마라가는 그를 믿지 않았다.

   성모님께서는 실망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성 요한 디다쿠스에게 다시 발현하시어
내일 주교에게 다시 가서 성당을 반드시 세울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주교는 성모님께서 표적을 보여 주신다면 기꺼이 성모님을 위한 성당을
세우겠다고 말하였다.
성 요한 디다쿠스가 이 말을 다시 성모님께 전하자 성모님께서는 징표로써 테페약
산 정상에 올라가서 장미를 주워 주교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때는 12월이라 추웠고 또 돌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산 정상에 가니 과연 장미꽃들이 있었고 이를
틸마(외투 또는 보자기로 쓰이는 겉옷, 망토)에 담아 주교에게 내보였다.
그 순간 주교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겨울이라 장미꽃이 필 계절도 아니었지만 더욱 놀라웠던 것은 성 요한 디다쿠스의 틸마에 새겨진
그림 때문이었다. 바로 그 귀부인의 모습과 그 옷자락을 한 천사가 받들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귀부인은 스스로를 ‘과달루페(Guadalupe)의 평생 동정 마리아’로 불리기를 원하셨고 그 성화는
테페약 산 정상에 세워진 성당에 모셔졌다.

   그 후 성 요한 디다쿠스는 주교의 허락을 받고 성당 옆 작은 오두막집에 살면서 과달루페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성화를 보여주면서 성모님의 발현 과정과 의미를 설명하였다.
마침내 매일 수천 명씩 개종하더니 발현 후 7년 만에 우상 숭배와 인신 제사에 빠져 있던
멕시코인 800만 명이 거의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선교사의 활동만으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1709년 4월 27일 테페약 언덕에 과달루페 성모님을 위한 두 번째 큰 성당을 다시 설립하여
축성식을 갖고 과달루페 성모님을 멕시코의 수호자로 선포하자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이 자취를
감추는 기적도 일어났다. 그 후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인들의 신앙 속에 깊이 자리하였고,
국가의 중요한 시기마다 당신 백성들을 돌보아 주었다고 신자들은 깊이 믿고 있다.

   성 요한 디다쿠스는 성모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로 인정받기보다는 내적인 정화를 통해
하느님을 위한 기도와 가치가 충만한 삶을 살았다.
그는 1548년 5월 30일 생을 마감하면서 과달루페 성모님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1990년 4월 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그해 5월 6일 멕시코시티에서 시복 승인 기념식이 열렸다. 이어서 그는 2002년 7월 31일
멕시코 과달루페의 동정 마리아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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