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2월4(금)聖女바르바라, 다마스쿠스의 聖요한사제학자님..등

H-Simon 2009. 12. 3. 13:39

 

 
12월4(금)
   聖女바르바라, 다마스쿠스의 聖요한사제학자님..등

                   

          

                    사랑하는 예수님,

                    대림절,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려운 웃을 통해 찾아 오시는 당신을

                    사랑으로 영접할 수 있도록, 

                    저희의 눈을 밝게  해 주옵소서,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마루타** Maruthas 12월 4일 주교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415년경
2 멜레시오 Meletius 12월 4일 주교 폰투스(Pontus) +295년
3 성녀 바르바라 ** Barbara 12월 4일 동정 순교자   +306년?
4 베르나르도 ** Bernard 12월 4일 추기경 파르마(Parma) +1133년
5 안논 ** Annon 12월 4일 주교 쾰른(Koln) +1075년
6 오스문도  Osmund 12월 4일 주교 솔즈베리(Salisbury) +1099년
7 요한 ** John 12월 4일 신부,교회학자,교부 다마스쿠스(Damascus) 650?-754년
8 요한 칼라브리아  John Calabria 12월 4일 신부,설립자   1873-1954년
9 테오파네 Theophanes 12월 4일 증거자   +815년
10 펠릭스 Felix 12월 4일 주교 볼로냐(Bologna) +429년
총 10 성인

 

 

 

    ▶마루타(12.4)
 
성인명 마루타(Maruthas)
축일 12월 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활동연도 +415년경
같은이름 마루따, 마루따스, 마루타스
 

   페르시아 국경 지방의 티그리스(Tigris) 강과 반(Van) 호수 중간에 위치한
마이페르카트(Maiferkat)의 주교인 성 마루타는 사푸르 왕의 박해 동안 일어난 순교역사를
기록하고 또 수많은 유해를 마르티로폴리스라 부르는 도시로 이장하였다.
또 그는 순교자를 찬양하는 찬미가를 여러 편 지었고,
시리아 교회에서 성무일도를 바칠 때마다 사용토록 하였다.

   399년에 새 왕이 등극하자 그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가서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요구하는 외교적인 활동을 서슴없이 하였다.
또한 그는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외교사절 역할을 수행하면서 페르시아의 교회 조직 재건을
가능케 하고 여러 곳에 성당을 세웠다.
이 때문에 그는 시리아(Syria) 교회의 아버지로 불리며, 또 의학 지식도 있었던 분으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그는 성 에프라임(Ephraem, 6월 9일) 이후 시리아의 위대한 교회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바르바라(12.4)
 
성인명 바르바라(Barbara)
축일 12월 4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306년?
같은이름 발바라

 

성녀 바르바라(Barbara)


   중세 시대에 가장 인기 있던 성인들 중의 한 분이 동정 순교자인 성녀 바르바라임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유력한 어느 전승에 의하면 그녀는 디오스코루스(Dioscorus)의 딸로서
뛰어난 미모를 지녔는데, 그의 부친은 수많은 청혼자들의 기를 꺾기 위하여
그녀를 탑 속에 가두었다고 한다. 어느 날 부친은 그녀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알고는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녀는 아버지의 분노를 피하여 기적적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붙잡힌 그녀는 이번에는 재판관 앞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한 벌로도 만족하지 못한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산으로 끌고 가서 죽이라고 명하여
그녀는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 그녀의 순교지는 안티오키아(Antiochia),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니코메디아(Nicomedia) 그리고 로마(Roma) 등 서로 엇갈린다.
성녀 바르바라는 건축가와 건축업자의 수호성인이다.
 
 
 
 
 
 
   ▶베르나르도(12.4)
 
성인명 베르나르도(Bernard)
축일 12월 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추기경
활동지역 파르마(Parma)
활동연도 +1133년
같은이름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좌~ 성 베르나르도, 성 피델리스, 성녀 가타리나, 성 요한 괄베르토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우베르티(Uberti) 가문 출신인 성 베르나르두스는
산 살비오(San Salvio) 수도원의 원장과 베네딕토회 발룸브로사 연합회의 총장을 거쳐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에 의하여 파르마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의 파르마는 이교와 이단 때문에 골치를 앓던 도시였다.
성 베르나르두스가 이 도시의 주교가 되자마자 교황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성직매매를
완전히 추방하고 타락한 교구를 극적으로 소생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2년 동안의 유배생활도 감수해야 했다.
 
 
 
 
 
 
  ▶안논(12.4)
 
성인명 안논(Annon)
축일 12월 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쾰른(Koln)
활동연도 +1075년
같은이름 안노, 한노

 


   성 안논의 부친은 독일의 슈바벤(Schwaben)의 귀족이었으므로 아들을 훌륭히 키워 가계를
다시 일으킬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밤베르크(Bamberg)의 참사위원이던 그의 친척이 그를 신임하여 안논은 밤베르크의
주교좌 학교에서 수학하고 결국에는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안논은 학문과 웅변도 뛰어났지만 좋은 안목을 지녔으며 예모가 올발랐다.
그래서 그는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의 주목을 끌게 되어 1056년 황제의 고해신부로 발탁되었다.
그 후 46세 때 쾰른의 대주교로 피선되었고 제국의 수상직에 올랐다.

   파르마(Parma)의 주교 카달루스(Cadalus)가 대립교황이 되어 알렉산데르 2세 교황에 맞섰을 때,
그는 독일 주교단의 지도자로서 알렉산데르 교황을 지지하였다.
만년에 그는 자신이 세운 지그부르크(Siegburg) 수도원에서 엄격한 회개 생활을 하다가
1075년 12월 4일 운명하였다.
도덕적으로 타락이 극심하던 시대에 안논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오히려 모범적이며
다른 사람들의 척도로서 자신을 잘 지켰다.
그리하여 수많은 성인 중에서도 그는 자신의 사생활을 가장 성스럽게 산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안노(Anno) 또는 한노(Hanno)로도 불린다.
 
 
 
 
 
 
 ▶요한(12.4)
 
성인명 요한(John)
축일 12월 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교회학자, 교부
활동지역 다마스쿠스(Damascus)
활동연도 650?-754년
같은이름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Joannes)은 그리스 교부로서는 마지막 인물로
그리스도교적 아리스토텔레스 학풍을 개척한 분이며,
성 로마누스 작곡가와 더불어 동방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아랍인들이 635년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마호메트의 후계자인 칼리프들의 치하에서
전 생애를 보냈지만, 성 테오도루스 스투디테스(Theodorus Studites, 11월 11일)와 더불어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성상 공경 논쟁이 가장 극심하던 시기에 끝까지 성상 공경의
정당성을 펼쳤던 위대한 교부이다.

   성 요한은 그의 대표작인 “올바른 신앙에 관한 해설”에서 교회의 가르침 곧 하느님과 창조,
인간론, 그리스도론, 마리아론, 성인 공경과 성화 공경, 구원론, 종말론을 100장에 걸쳐 다루었다.
이 저서는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의
"신학대전"에 버금가는 역저로 동방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교육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때의 다마스쿠스는 아랍인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칼리프들은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쳤다.
성 요한의 가문은 몇 세대에 걸쳐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고위 관리였고, 이 직책은 세습제였다.
그래서 요한은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부친이 직접 그에게 교육을 시키고, 말 타는 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부친 외에 요한은 코스마(Cosmas)라 부르는 훌륭한 스승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코스마는 그에게 여러 학문을 가르쳤는데, 특히 신학을 강조했다. 장성한 요한은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여 국가의 관리가 되었다.
그는 궁중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적 덕행, 특히 겸손한 자세로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가 이토록 훌륭하게 성장한 것은 그의 스승 코스마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후임 칼리프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포기하자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고위 관직을 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직하고 코스마와 함께 예루살렘 근처의 마르 사바(Mar Saba) 수도원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분위기는 아직도 성상 공경 문제가 쟁점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도자들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어쨌든 요한과 코스마는 책을 저술하거나 찬미가를 짓는 등의 일을 하면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장상과 다른 수도자들의 냉대와 질시 속에서도 그는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게 처신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모님은 그의 스승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대의 제자에게 많은 책을 쓰고 또 아름다운 시를 쓰도록 허락하여라.”
이때부터 요한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성서와 교부 문헌 연구 및 저술 활동에 할애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다마스쿠스 거리로 나가 광주리를 팔았다고도 한다.
이때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인 요한 5세는 그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코스마를
마유마의 주교로 축성하고, 성 요한은 사제로 서품하여 예루살렘으로 불렀다.

   그런데 코스마 주교는 죽을 때까지 주교로서 양떼를 돌보았으나, 성 요한은 이내 수도원으로
되돌아와 자신의 저술을 다시금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이때부터 그의 저서는 도처에서 읽혀졌으나 반대자들의 질시 또한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시인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754년 12월 4일 고령으로 선종해서 마르 사바
수도원에 묻혔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0년 8월 19일 교령에서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