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8일(토) 聖女 가타리나 라부레님..등

하느님 아버지,
성인 성녀님들의 공로에 힘입어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저희를,
아버지의 한 없는 사랑으로 강복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아멘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
성 인 명 |
영 어 명 |
축 일 |
신 분 |
지 역 |
연 도 |
1 |
성녀 |
|
Catherine Laboure |
11월 28일 |
수녀,환시자 |
|
1806-1876년 |
2 |
성 |
루포 |
Rufus |
11월 28일 |
순교자 |
|
+304년 |
3 |
성 |
만수에토 |
Mansuetus |
11월 28일 |
주교,순교자 |
|
+5세기 |
4 |
성 |
바실리오** |
Basil |
11월 28일 |
수도승,순교자 |
|
+765년 |
5 |
성 |
발레리아노 |
Valerian |
11월 28일 |
주교,증거자 |
아프리카(Africa) |
+5세기 |
6 |
성 |
베드로☞4 |
Peter |
11월 28일 |
수도승,순교자 |
|
+765년 |
7 |
성 |
소스테네 |
Sosthenes |
11월 28일 |
바오로의 제자,증거자 |
|
+1세기 |
8 |
성 |
스테파노☞4 |
Stephen |
11월 28일 |
은수자,순교자 |
|
715-765년 |
9 |
성 |
시메온 |
Simeon |
11월 28일 |
저술가 |
|
+1000년경 |
10 |
성 |
안드레아☞4 |
Andrew |
11월 28일 |
수도승,순교자 |
|
+765년 |
11 |
성 |
야고보 ** |
James |
11월 28일 |
신부 |
마르케(Marche) |
+1476년 |
12 |
복자 |
야고보 톰슨 |
James Thompson |
11월 28일 |
신부,순교자 |
|
+1582년 |
13 |
성 |
에우스타키오 |
Eustachius |
11월 28일 |
주교,증거자 |
아프리카(Africa) |
+5세기 |
14 |
성 |
|
Joseph Mary Pignatelli |
11월 28일 |
신부 |
에스파냐(Espana) |
1737-1811년 |
15 |
성 |
우르바노** |
Urban |
11월 28일 |
주교,증거자 |
아프리카(Africa) |
+5세기 |
16 |
성 |
크레센스 ☞15 |
Crescens |
11월 28일 |
주교,증거자 |
아프리카(Africa) |
+5세기 |
17 |
성 |
크레센시아노☞15 |
Crescentian |
11월 28일 |
주교,증거자 |
아프리카(Africa) |
+5세기 |
18 |
성 |
크레스코니오☞15 |
Cresconius |
11월 28일 |
주교,증거자 |
아프리카(Africa) |
+5세기 |
19 |
성 |
파피니아노☞15 |
Papinianus |
11월 28일 |
주교,순교자 |
|
+5세기 |
20 |
성 |
펠릭스☞15 |
Felix |
11월 28일 |
주교,증거자 |
아프리카(Africa) |
+5세기 |
21 |
성 |
플로렌시아노☞15 |
Florentian |
11월 28일 |
주교,증거자 |
아프리카(Africa) |
+5세기 |
22 |
성 |
호르툴라노☞15 |
Hortulanus |
11월 28일 |
주교,증거자 |
아프리카(Africa) |
+5세기 |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는 프랑스의 디종(Dijon) 근교 팽-레-무티에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서
조에 라부레(Zoe Labour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8살 때 어머니를 여의였고 또 언니인 루이자(Louisa)가 파리(Paris)의 자비 수녀회에
입회하자 어린 나이에 삼촌의 카페에서 일을 하며 가사 일을 돌보아야만 했다.
그녀는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처지라 읽고 쓰는 것조차 배울 수가 없었다.
14살 때부터 수도성소를 느낀 그녀는 아버지의 반대를 극복하고 마침내 언니를 뒤따라
1830년 샤티용쉬르센에 있는 성 빈첸시오 드 폴의 파리의 자비 수녀회에 입회하여
카타리나라는 수도명을 얻었다. 지원기를 마친 그녀는 파리의 뤼 뒤박 수도원으로 갔다.
그녀는 수도원 성당에서 일련의 성모 환시를 보게 되었는데, 이 환시에서 성모님은
당신이 원죄 없이 잉태하셨음을 표시하고 공경하는 메달을 만들라는 부탁을 여러 차례
하셨다. 그녀의 고해신부인 알라델(Aladel) 신부는 이 메달을 만들어도 좋다는 허가를
파리의 켈랑 대주교로부터 받고, 1832년에 처음으로 1500개의 만든 것이
즉시 백만 개의 메달로 불어나면서부터 유명한 기적의 메달이 된 것이다.
성녀 카타리나의 환시는 파리의 대주교가 임명한 특별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1836년에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이 결과 기적의 메달은 급속도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1831년부터 죽을 때까지 파리의 앙기앵(Enghien) 요양원에서 천한 일을 하면서
수도생활에 전념하였고, 고해신부에게만 자신의 환시를 늘 말씀드리고 지도를 받으면서
생활하였다.
그녀는 1933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7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
비잔틴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 파괴 박해가 거세게 휘몰아칠 때,
성 스테파누스(Stephanus)는 성화 공경의 옹호자로서 콘스탄티노플의 최초 지도자였다.
그는 원래 칼케돈 근방 성 아욱센티우스 산의 은수자였으나, 성화 공경과 연루되어
3년 동안 마르마라해의 프로콘네수스 섬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곧장 황제 앞으로 달려가서 질문을 던졌다.
그는 황제상이 새겨진 동전을 하나 들고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여기에 박힌 황제상이 수모를 당한다면 참지 못하겠지요? 그런데 하물며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그 모친이신 마리아의 상을 불 속에 처넣다니요?”
이런 말을 한 뒤에 그는 동전을 마루에 내팽개쳤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진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게 하였는데, 이렇게 갇힌 수도자 수효가 300명을 넘었다고 한다.
황제는 그를 사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리지 못하였으나 그의 부하들이
성 스테파누스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때 성 바실리우스, 성 베드로, 성 안드레아 등의
수도자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함께 순교하였다.
☞ 6, 8, 10..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
성 야고보는 이탈리아의 간갈라 집안 출신으로 마르케 지방 안코나의 몬테브란도네에서
가난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16년에 아시시(Assisi)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마치고, 피에졸레)에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5월 20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29세의 나이로 사제가 된 그는 즉시 토스카나, 움브리아 그리고 마르케 지방 등을 돌며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을 더욱 단련하기 위하여 하루에 3시간만 잠을 잤고,
대부분의 시간은 책 사본을 만드는데 보냈으며, 항상 다 헤어진 의복만을 입고 지냈다.
또한 그는 작은 형제회와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 간의 화합을 위하여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는 밀라노(Milano)의 주교로도 천거되었으나 거절하였다.
1476년 11월 28일 나폴리에서 선종한 그는 1624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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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년 12월 27일 에스파냐 북동부 사라고사(Zaragoza)에서
칼라브리아의 몬텔레오네공작 가문 출신의 아버지 돈 안토니오와
에스파냐 백작 가문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성 요셉 마리아 피냐텔리는 16세 때에
타라고나의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칼라튜드와 사라고사 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힌 결핵에 걸렸다.
1762년 사제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감옥에서 죄수 담당 신부로 활동하였다.
특히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들을 자애롭게 돌보아 '사형수들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1767년부터 에스파냐 예수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을 때 원장직을 물려받은
그와 동료들은 그들의 수도회를 포기하도록 종용받았으나 거부하였다.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에스파냐의 강력한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회의 해체를
선언했을 때, 그는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로 은거하여 약 20년 동안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예수회 역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여기서 그는 백러시아(White Russia, 오늘날의 벨로루시) 선교를 위한 수련소 허가를
교황청으로부터 받아내어 후보자를 양성하는 한편 예수회의 재건과 쇄신을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실제로 1807년 사르데냐(Sardegna)의 예수회 관구를 회복시켰고, 로마와 티볼리
그리고 오르비에토에서도 그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던 중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1811년 11월 11일 로마의 산 판탈레오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그렇게도 원하고 또 노력하였던 예수회의 재건은 1814년 8월 7일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교서로 발표되었다. 그는 1933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4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편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일컬어 '예수회의 재건자'라고 불렀다. |
아프리카의 주교인 성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성 우르바누스(Urbanus, 또는 우르바노),
성 크레스켄스(Crescens), 성 에우스타키우스(Eustachius), 성 크레스코니우스(Cresconius),
성 크레스켄티아누스(Crescentianus), 성 펠릭스(Felix), 성 호르툴라누스(Hortulanus)와
성 플로렌티아누스(Florentianus)는 그 지방을 점령한 아리우스파(Arianism)의 반달족 왕
젠세릭의 박해로 인해 모두 자신의 교구에서 추방되어 유배를 떠났다.
유배지에서 그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모두 숨을 거두었다. 신앙의 증거자로서 공경을 받는
그들은 또한 끝까지 신앙을 지킨 순교자로서도 공경을 받고 있다.
☞ 15, 16, 17, 18. 19, 20, 21. 22..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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