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6일(월)
聖女마르가리타, 聖女제르트루다님..등
자비로우신 하느님,
천상의 성인 성녀님들을 따라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저희를,
아버지의 한 없는 사랑으로 강복해 주옵소서.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
그라티아는 달마티아(Dalmatia)의 카타로 출신 상인으로 30세까지 바다를 항해하며
장사를 하였다.
어느 날 우연하게 베네치아(Venezia)의 성당에 이르러 어느 아우구스티누스 회원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서는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파도바(Padova) 교외의 몬테 오르토노(Monte Ortono)에서 평수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주로 정원지기로 일했는데 그의 성덕이 뛰어나 모든 수도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가 베네치아의 성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 수도원에 살 때에는 신비스런 빛이
그의 방을 늘 비추었고, 그의 간구로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71세 때에 그는 중병에 걸려 운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89년에 승인되었다. |
성 로쿠스 곤잘레스는 에스파냐의 귀족 출신으로서 1576년에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Asunciun)에 왔다. 그는 특히 착하고 열심한 소년이었고 사제를 지망하였다.
마침내 그가 23세 때에 사제가 되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은 사제직에 부적합하다고
느끼고 인디언들에게 관심을 보이다가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이때가 바로 유명한 파라과이 ‘정복’이 시작될 때였다. 에스파냐는 제국주의를 앞세워
이 나라를 무참하게 짓밟고 통치하였으며,
예수회 회원들은 그들의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원주민들의 개종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런 와중에 로코 신부는 거의 20년 동안이나 선교활동을 했는데, 원주민들로부터는
적대감을 이겨야했고, 정복자인 유럽인들로부터는 공개적인 반대와 억압을 받아야만 했다.
1628년 로코 신부는 적개심을 지닌 ‘마술사’ 일당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그가 살던 목조 건물은 불탔는데, 그 역시 그 화염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
헝가리의 레스카(Reska)에서 앵글로 색슨 왕조 최후의 왕 에드워드 애틀링(Edward Atheling)과
헝가리의 왕비 아가타 사이에서 태어난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헝가리의 성왕 스테파누스(Stephanus, 8월 16일)의 조카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성 스테파누스 왕의 궁중에서 보냈으며, 부왕이 세상을 떠난 후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에서 패하자 가족과 함께 헝가리로 피난을 가려고 했지만
배가 표류하여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다.
그녀는 여기서 스코틀랜드의 왕 말콤 3세(Malcolm III)와 결혼하였다.
왕비가 된 성녀 마르가리타는 여섯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를 낳고 직접 훌륭하게 교육하였는데,
스코틀랜드의 성 다윗 1세(David I, 5월 24일)가 바로 그녀의 아들이다.
그녀의 성덕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특히 기도와 고행과 단식에서 철저하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놀라웠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하던 성직남용과
성직매매를 금지하려는 시노드(Synod)를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예술과 교육의 진흥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고,
던펌린(Dunfermline)에 성삼위 대수도원을 세우는 등 교회 안팎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1093년 11월 16일 에든버러(Edinburgh)에서 선종하였고,
124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IV)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
헬프타의 성녀 멕틸다(Mechtildis, 좌)와 성녀 제르트루다(Gertrudis, 우 |
성녀 멕틸다는 로데스포르프(Rodersforf)에서 수녀가 되어 처음에는 어린이들의 교육을 맡았다.
1258년 수녀들이 작센(Sachsen)의 헬프타로 옮겨가서 3년이 지난 후에
성녀 대 제르트루다(Gertrudis, 11월 16일)가 수녀원 교육을 받으러 들어왔는데,
이때 그녀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래서 성녀 멕틸다는 성녀 제르트루다가 장성할 때까지 돌봐주고 뛰어난 신비가로 키웠으며,
자기 자신도 ‘그리스도의 나이팅게일’이 되어 그녀와 같은 신비적인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그녀의 제자인 성녀 제르트루다가 자신의 신비체험을 써내려 갈 때, 처음에는 그것을 쓰지 말도록
경고하였으나 주님께서 성녀 멕틸다의 마음에도 감도하셨기에 결국 위대한 책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성녀 멕틸다도 영적인 체험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성녀 멕틸다의 계시록” 혹은
“특별한 은혜에 관한 책”으로 불리는 책이다.
그녀는 1298년 11월 19일 헬프타 수녀원에서 선종하였다. 성녀 멕틸다는 공식적으로 시성된 바
없으나 그 때문에 그녀에 대한 신심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이며 성녀 클라라(Clara)의 동생인 성녀 아녜스는
불과 15세의 나이로 언니인 클라라의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언니 클라라가 수녀회로 들어간 후 집안 단속이 심하였지만 그녀의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마침내 친척들이 아녜스를 억지로 끌고 가려고 산 안젤로 디 판초 수도원으로 몰려왔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버티었다. 마침내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았고,
언니와 함께 성 다미아노 성당 곁에서 살았다.
그 후 아녜스는 1219년 프란치스코가 세운 피렌체(Firenze) 근교 몬티첼리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고, 만투아(Mantua), 베네치아(Venezia), 파도바(Padova) 등지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언니를 도와 클라라회의 청빈 정신을 고수하기 위하여 분투노력하였다.
아녜스가 죽을 때 언니가 동석했는데, 클라라가 예언한 대로 11월 16일에 운명하였다.
아시시의 산타 키아라 성당에 안치된 그녀의 묘소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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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
제르트루다(대)(Gertrude the Great) |
축일 |
11월 16일 |
성인구분 |
성녀 |
신분 |
수녀, 신비가, 저술가 |
활동지역 |
헬프타(Helfta) |
활동연도 |
1256-1302년 |
같은이름 |
거트루드, 게르투르다, 게르투르데스, 게르투르디스, 게르트루다, 제르뜨루다, 제르뜨루디스, 제르트루디스, 젤뚜르다, 젤뜨루다, 젤투르다, 젤트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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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위대한 제르트루다'(Gertrudis)로 불리는 성녀는 1256년 1월 6일 독일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이 되던 1261년 아이슬레벤(Eisleben)에 있는 헬프타 시토회 수녀원 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수도원은 성덕으로 유명하였는데, 이 수도원의 설립자이자 원장인 하크본(Hackeborn)의
제르트루다는 수녀원을 지혜롭게 운영했으며 그곳을 문화와 영성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수녀원장의 동생이면서 수련장이었던 성녀 멕틸다(Mechtildis) 수녀 밑에서
개방적이고 휴머니즘적인 교육을 받았다.
15세 때 학교를 마치고 수녀회에 입회하였는데, 그녀의 지적 열망과 타고난 지능으로 베네딕투스
성인의 영성뿐 아니라 음악, 문학, 문법학, 예술 등에 능통하였다.
그런데 1281년 1월 27일 예수의 발현을 체험하고 나서는 세속적인 학문에 흥미를 잃고
오로지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 그리고 전례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또한 그녀의 생활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영적 체험의 연속이었다.
그녀의 삶과 그리스도의 발현,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비로운 은총적 계시를
다룬 5권의 책이 “하느님의 사랑의 사자”(Legatus divinae pietatis)로 대표적인 저서이다.
그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 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의 체험과 헌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영성사에서 ‘예수 성심의 신학자’라고 불리어졌고, 예수 성심 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첫 사도로 여겨졌다. 그녀는 중세의 신비신학과 신비주의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특히 13세기 독일 교회 안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가로 여겨지고,
그녀의 풍부한 신비 경험으로 ‘독일의 테레사’라고도 칭해진다.
1302년 11월 16일 헬프타 수도원에서 중병을 앓던 그녀는 “아!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5세였다.
제르트루다는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1606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전례의 기도, 독서, 찬가에서 그녀를 공경할 수 있다는 승인을 받았다.
1738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는 다른 제르트루다 성녀와 구별하고
그녀의 영적인 깊이를 재평가하면서 ‘위대한’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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