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루멘티우스(또는 프루멘시오)와 또 다른 청년인 아이데시우스(Aedesius)는 형제지간으로
페니키아(Phoenicia, 오늘날 시리아, 레바논 해안지대의 고대 지명)의 가장 큰 항구도시인 티레
태생이며, 에티오피아의 첫 번째 복음 선포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 당시 인물인 루피누스(Rufinus)에 따르면 성 프루멘티우스와 아이데시우스는
티레의 철학자인 메로피우스(Meropius)의 젊은 문하생이었다.
메로피우스는 330년경 아라비아 해안을 따라 항해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이 두 젊은 제자들이
스승과 동반하였다.
그들의 여행은 잘 이루어졌고 돌아오는 길에 신선한 음식을 구하기 위해 에티오피아에 정박했는데,
그곳에서 선원들과 그 지방 사람들과 싸움이 나서 스승과 모든 선원들이 살해당했다.
그런데 이 두 형제는 당시 배를 떠나 있어서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체포되어 에티오피아의 고대 수도인 악숨에 있는 왕궁으로 끌려갔으나
왕은 오히려 그들을 신하로 삼으면서 아이데시우스에게는 궁중 연회에서 술을 따르는 직책을 그
리고 성 프루멘티우스에게는 서기직을 맡겼다.
그들은 왕이 죽은 뒤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왕비의 요청으로 그 지방에 계속 머물면서
서방의 상인들로부터 그리스도교에 대해 전해 듣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왕의 아들이 계승하게 되자 그들은 완전히 석방되어 아이데시우스는 티레로 돌아가서
사제가 되었고, 성 프루멘티우스는 347년경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에게 가서 에티오피아의 선교사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그를 악숨의 주교로 축성하여 파견하였다.
그의 선교 활동은 왕의 형제들을 비롯한 수많은 개종자를 얻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 프루멘티우스가 사망한 후 에티오피아에서는 그를 ‘아부나’(Abuna)라고 불렀는데
이는 '우리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현재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총대주교에게
사용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