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은 이탈리아 중부 아브르초 지방의 카피스트라노에서 1386년 6월 24일에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전투에서 사망한 후 요한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다가 1406년
페루자로 가서 법률을 공부하였고, 1412년에 나폴리의 왕 라디슬라우스에 의해 페루자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1416년 페루자와 말라테스타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평화를 제안하는 사절로
말라테스타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로로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 당시 요한은 전쟁 직전에 산 발렌티노 백작의 딸과 결혼한 상태였으나
혼인이 완결된 상태는 아니었다.
브루파감옥에 갇힌 그는 진지하게 영혼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오자 수도자가 되고자 혼인에 대한 관면을 받고 1415년 10월 4일
페루자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오누프리우스 데 세자노의 지도를 받으며 수련을 받았다.
이듬해 서원을 하고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 5월 20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다가 142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즉시 설교자로 나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수많은 이들이 개종하였고 또 수도생활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게 하였다. 또한 그는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누스와 함께
프란치스코회의 개혁을 위하여도 큰 활동을 하였고,
그들의 노력으로 여러 지파로 나눠져 있던 프란치스코회가 잠시나마 일치를 누리기도 했다(1430년).
성 요한은 1435-1436년에 교황특사로 활동했으며, 1436년 12월에는 그의 노력으로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들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1437년에는 페라라의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개혁을 도왔다.
1439년 말에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였고, 1440-1442년까지 밀라노에서 설교와 저술 활동을 하였다.
1442년 말과 1443년에는 부르고뉴와 플랑드르를 방문하여 필리프 3세가
대립교황인 펠릭스 5세와 동맹을 맺지 않도록 설득하였다.
그는 바이에른작센 그리고 폴란드를 두루 다니며 설교하여 신앙을 크게 부흥시켰고,
이단자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활동은 터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써 끝났다. 그는 이것으로 선교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십자군들에게 설교하러 다녔다.
그는 1456년 9월 1일 일록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그에 대한 신자들의 공경이 곧 시작되어 1514년에 술모나 교구 내에서 그에 대한
공경이 허락되었고, 1690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데르 8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요한에 대한 공경은 1880년에 보편 교회로 확산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