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0월10일(토)聖女에울람피아, 聖프란치스코 보르자님..등

H-Simon 2009. 10. 9. 11:50

 

 
10월10일(토)
  聖女에울람피아, 聖프란치스코 보르자님..등
         

                     하느님 아버지,

                    성인 성녀님들의 공로에 힘입어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저희를,

                    아버지의 한 없는 사랑으로 강복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아멘


                                                   ****         ****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해당 번호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니콜라오 ** Nicholas 10월 10일 신부,순교자 모로코(Morocco) +1227년
2 다니엘 ☞1 Daniel 10월 10일 신부,순교자 모로코(Morocco) +1227년
3 다니엘 콤보니 Daniel Comboni 10월 10일 주교,설립자,선교사 아프리카(Africa) 1831-1881년
4 돔노 ☞1 Domnus 10월 10일 수사,순교자 모로코(Morocco) +1227년
5 레오☞1 Leo 10월 10일 신부,순교자 모로코(Morocco) +1227년
6 마아르사포르 Maharsapor 10월 10일 순교자 페르시아(Persia) +421년
7 바울리노 Paulinus 10월 10일 주교,선교사 요크(York) +644년
8 바울리노 Paulinus 10월 10일 주교 카푸아(Capua) +843년
9 빅토르 Victor 10월 10일 순교자   +286년경
10 사무엘 ☞1 Samuel 10월 10일 신부,순교자 모로코(Morocco) +1227년
11 안젤로☞1 Angelus 10월 10일 신부,순교자 모로코(Morocco) +1227년
12 성녀 에울람피아** Eulampia 10월 10일 동정 순교자   +310년경?
13 에울람피오☞12 Eulampius 10월 10일 순교자   +310년경?
14 제레온 Gereon 10월 10일 순교자 쾰른(Koln) +4세기초?
15 체르보니오 Cerbonius 10월 10일 주교 포풀로니아(Populonia) +580년
16 체르보니오 Cerbonius 10월 10일 주교 베로나(Verona) +400년
17 카시오 Cassius 10월 10일 순교자 본(Bonn) +303년
18 프란치스코 보르자 ** Francis Borgia 10월 10일 신부,총장 아라곤(Aragun) 1510-1572년
19 플로렌시오 Florentius 10월 10일 순교자 본(Bonn) +303년
20 피니토 Pinytus 10월 10일 주교 크레타(Creta) +180년경
21 후골리노☞1 Hugolinus 10월 10일 신부,순교자 모로코(Morocco) +1227년

총 21 성인

 
 
   ▶니콜라오(10.10)
 
성인명 니콜라오(Nicholas)
축일 10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모로코(Morocco)
활동연도 +1227년
같은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1227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를 위해 파견된 작은 형제회 소속 선교사들이
모로코에서 순교하였는데, 이 선교단은 성 다니엘(Daniel)이 이끌었으며 함께 순교한 선교사들의
이름은 성 사무엘(Samuel), 성 안젤루스(Angelus), 성 레오(Leo), 성 돔누스(Domnus),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 그리고 성 후골리누스(Hugolinus)이다.

   성 다니엘이 이끄는 선교단은 모로코에 도착하여 유럽 상인들이 거주하던 체우타(Ceuta) 근교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그들은 서로 고해성사를 받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면서 기도로써 밤을 지새고,
일요일 아침에 체우타로 들어가서 길거리에 서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출현이 소란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그들은 '카디' 앞에 끌려갔다.
그는 수도자들의 남루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고는 미쳤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감옥에 가두었는데, 무어인들은 그들은 마음대로 놀리고 학대하였다.

   다음 일요일, 그들은 자신들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선교사라고 항변하였다.
그러자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마호메트를 믿으라고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은
자행하였고, 결국은 체우타 성벽 밖에서 그들을 모두 참수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후일 에스파냐로 모셔졌고, 1516년 시성식에서 교황 레오 10세는
성 다니엘과 동료 순교자들의 축일을 성대히 거행토록 하였다.
 
 
     ▶다니엘 콤보니(10.10)
 
성인명 다니엘 콤보니(Daniel Comboni)
축일 10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설립자, 선교사
활동지역 아프리카(Africa)
활동연도 1831-1881년
같은이름 꼼보니, 다니엘레, 대니얼

 


   1931년 3월 15일 북부 이탈리아의 브레시아(Brescia) 근처 가르다(Garda) 호숫가의
리모네 산 조반니에서 출생한 성 다니엘 콤보니는 농부였던 부모에게서 태어난 여덟 자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교구 신학교를 다닌 후 베로나(Verona)에 있는 마차(Mazza) 신부의 선교사 양성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장차 아프리카 선교를 하겠다는 뜻을 품고 신학 외에도 몇 가지 외국어와 의학을 공부하였다.
1857년 수단 선교를 위한 탐험대와 함께 중앙아프리카로 파견된 그는 나일 강 상류 지방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열악한 여건과 적대적인 환경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에 세 명의
신부가 사망하였다. 그래서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은 이 지방의 선교를 포기하고
성 다니엘 신부와 동료들을 이탈리아로 귀환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마차 신부의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1964년
‘아프리카인들을 통해서 아프리카를 구원하자’는 선교 계획을 구상하였다.
즉 유럽인들이 해안선을 따라 선교지를 구축하고 그곳에서 아프리카인들을 교육시켜
내륙으로 파견하자는 계획이었다.
1867년 그는 교황의 허가를 얻어 베로나 사제회(Verona Fathers)라고도 불리는
콤보니의 예수 성심 선교회를 설립하고, 이집트의 카이로에 아프리카인 남성과 여성을 위한
두 개의 학교를 세웠다. 모금을 위한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1872년에
베로나 수녀회(Verona Sisters)라고도 불리는 니그리지아 신심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1872년 성 콤보니 신부는 수단, 누비아 그리고 큰 호수들의 남쪽 영토들을 포함하며
이집트부터 짐바브웨까지, 그리고 홍해부터 말리까지를 관장하는 중앙아프리카 대목구의
부대목에 임명되었고 1877년에는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선교지 확보와 기금 마련을 위해 유럽과 아프리카를 오가며 헌신하다가 1881년 7월
말라리아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수개월간 계속 일을 하다가 결국 그해 10월 10일
하르툼(Khartoum)에서 세상을 떠났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6년 3월 17일에 그를 복자품에 올렸으며, 2003년 10월 5일 시성하였다.
 
 
  ▶에울람피아(10.10)
 
성인명 에울람피아(Eulampia)
축일 10월 1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310년경?
같은이름 에울람비아, 에울람삐아
 

   순교자 성 에울람피우스(Eulampius)와 성녀 에울람피아는 갈리에누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한 듯 보인다. 에울람피우스는 아주 젊은 사람이었는데, 니코메디아(Nicomedia)의 박해가
가열되자 이를 피하여 동굴에서 지냈다. 한 번은 그가 음식을 구하러 읍내로 갔다가
그리스도교를 금하는 포고문을 보고 읽고 있던 중에 어떤 군인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겁에 질려 말도 못하고 다리는 떨고 있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그 군인이 그를 잡아 족쇄를
채우고 온갖 고문을 가하면서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교도의 신과 우상을 공경할 수 없다고 맹세까지 하였다.
화가 치민 집정관은 이 소년을 때리고 발길질을 하여 실신시켰다.

   에울람피아는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군중들을 헤치고 들어가서 오빠를 껴안고 울부짖었다.
이리하여 이 어린 남매가 온갖 고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끓는 기름 속에 집어넣어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자,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군중들이 오히려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이들 남매는 결국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프란치스코 보르자(10.10)
 
성인명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 Borgia)
축일 10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총장
활동지역 아라곤(Aragun)
활동연도 1510-1572년
같은이름 방지거, 보르지아,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는 간디아(Gandia)의 세 번째 공작인 후안(Juan)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5세의 비합법적인 딸인 후아나(Juana)의 14명의 자녀 중 맏이로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 근교 간디아에서 태어났다. 에스파냐 발렌시아 출생의 귀족 가문인
보르자가의 후손인 그는 사라고사(Zaragoza)의 대주교인 아저씨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528년에는 카를로스 5세(Carlos V)의 궁중 자문위원이 되었다. 1529년 그는
엘레아놀 데 카스트로(Eleanor de Castro)와 결혼하였고, 카를로스의 고문으로 10년을 봉직하다가
부친이 사망한 1543년부터 간디아의 공작 지위를 승계하였다.

   1546년 그의 아내가 8명의 자녀들을 남기고 사망했을 때 그는 수도생활을 추구하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548년에 예수회에 입회하려고 결정하였다.
1550년에 그가 로마(Roma)로 갔다가 다음 해에 자신의 재산 상속 문제로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로 설교 여행을 다녔는데,
그의 설교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이기가 일쑤였다.
1554년 그는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에 의해 에스파냐 예수회의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수많은 수도원과 대학 그리고 건물들을 세웠으며,
1565년에는 예수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7년 동안 총장직에 재임하는 동안 그는 예수회를 가톨릭 개혁운동의 기수로 만들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에 예수회의 참가를 독려하고, 그레고리안 대학교 설립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
됨은 물론 폴란드 관구 설정, 프랑스의 대학 설립, 아메리카 선교 개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567년 그는 예수회의 회칙을 개정하였고, 1571년에는 보넬리(Bonelli) 추기경을 수행하여
에스파냐 전역을 선교 여행하다가 로마로 돌아온 지 이틀 만인 1572년 9월 30일에 운명하였다.
예수회를 그토록 왕성하고 생기 있는 수도회로 만든 이유 때문에,
는 흔히 제2의 설립자로 불린다.
그는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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