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게라르두스는 880년경 벨기에 나무르 교구의 포스 근교인 스타브의
귀족 집안에서 상티오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머니 플렉트루드는 리에주의
주교인 스테파누스의 조카였다.
당시 귀족 신분의 자제들처럼 성 게라르두스 역시 기사 교육을 받았는데,
군대 안에서도 그의 경건함은 모든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브로뉴에 있는 한 경당을 크게 재건하고
성 에우게니우스의 유해를 안치했다.
917년경 나무르 공작은 성 게라르두스에게 프랑스 사절의 임무를 맡겼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수행원들을 파리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생드니수도원에서
머물렀다. 그곳에서 수도승들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사절의 임무를
마친 후 나무르 공작과 스테파누스 주교의 허락을 얻어
다시 생드니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수도자가 되어 생활하였고 사제품을 받았다. 그 뒤 브로뉴로 돌아온
그는 수도원 근처의 작은 골방에 칩거하면서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였다.
919년 그는 성 베드로와 성 에우게니우스에게 재봉헌된 브로뉴의 성당에
토지를 기증하였다.
923년 새 수도원의 아빠스가 된 그는 수도원이 자리를 잡고 평화롭게
성장하던 934년, 로렌의 지슬베르 공작으로부터 에노에 있는 수도원을
베네딕토회의 규칙을 준수하도록 개혁해 달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러한 그의 개혁 운동은 플랑드르지방에서만 일곱 개의 수도원에서 행해졌는데,
그 후 이 운동은 노르망디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개혁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953년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브로뉴로 돌아가 몽 블랑델수도원의
아빠스가 되었다. 그는 로마로 교황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이 개혁한
공동체들을 방문하였다. 그 후 브로뉴에서 머물다가 959년 10월 3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브로뉴에 안치되었고,
1131년 리에주의 주교인 알렉산데르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의 대리로
성인의 시신을 기리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이 예식은 사실상 시성과 동등한 효과를 지닌 것이었다.
17세기 이후 게르마누스는 성인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