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9월22일(화) 聖 마우리시오님..등

H-Simon 2009. 9. 21. 12:52

 

 
9월22일(화) 聖 마우리시오님..등

         

               하느님,   

               성인 성녀님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주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저희를,

 

               아버지의 한 없으신 사랑으로 강복해 주옵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리나이다....아멘

 

                                   ****         ****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해당 번호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성녀 디냐 Digna 9월 22일 동정 순교자 로마(Roma) +259년
2 라우토 Lauto 9월 22일 주교 콩스탕스(Constance) +568년
3 마우리시오 ** Maurice 9월 22일 군인,순교자 아가우눔(Agaunum) +287년경?
4 비탈리스☞3 Vitalis 9월 22일 군인,순교자 아가우눔(Agaunum) +287년경?
5 빅토르 ☞3 Victor 9월 22일 군인,순교자 아가우눔(Agaunum) +287년경?
6 성녀 살라베르가 ** Salaberga 9월 22일 수녀원장   +665년
7 상티노 Sanctinus 9월 22일 주교 뮤(Meux) +300년
8 성녀 에메리타 Emerita 9월 22일 동정 순교자 로마(Roma) +259년
9 엑스수페리오☞3 Exsuperius 9월 22일 군인,순교자 아가우눔(Agaunum) +287년경?
10 엠메라모  Emmeramus 9월 22일 주교 푸아티에(Poitiers) +7세기
11 요나 Jonas 9월 22일 신부,순교자   +3세기
12 이냐시오** Ignatius 9월 22일 신부 산티아(Santhia) 1686 –1770년
13 성녀 이라이스 Irais 9월 22일 동정 순교자   +300년
14 인노첸시오 ☞3 Innocent 9월 22일 군인,순교자 아가우눔(Agaunum) +287년경?
15 칸디도 ☞3 Candidus 9월 22일 군인,순교자 아가우눔(Agaunum) +287년경?
16 토마스  Thomas 9월 22일 대주교 빌라노바(Villanova) 1488-1555년
17 펠릭스 3세  Felix III 9월 22일 교황   +530년
18 포카** Phocas 9월 22일 정원사,순교자 시노페(Sinope) +303년
19 플로렌시오 Florentius 9월 22일 신부,은수자 글론느산(Mount Glonne) +5세기
총 19 성인

 

 

    ▶마우리시오(9.22)
 
성인명 마우리시오(Maurice)
축일 9월 2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군인, 순교자
활동지역 아가우눔(Agaunum)
활동연도 +287년경?
같은이름 마우리시우스, 마우리씨오, 마우리씨우스, 마우리티오, 마우리티우스, 모리스

   The Martyrdom of St Maurice


   프랑스 리옹의 주교인 성 에우케리우스에 의하면, 막시미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테반의 헤르쿨리우스 부대는 이집트 상류에서 온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부대장인 성 마우리티우스와 수많은 동료들은 바고데족을 격퇴한 승전 축하연에서
이방신에게 희생 제물 드리는 것을 거절하였다.
거듭 같은 명령이 떨어졌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었기 때문에 황제는 반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일단의 테반 부대원들을 아가우눔에서 전멸시켰다고 한다.

   이들의 지도자는 성 마우리티우스와 엑스수페리우스(Exsuperius) 그리고
칸디두스(Candidus)였다고 한다. 또한 이름이 전해지는 군인 순교자로
성 비탈리스(Vitalis), 빅토르(Victor),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등이 있다.
후일 전기 작가들은 쾰른에서 파엔그라까지 무수한 무명의 테반 부대 순교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현재 생 모르스 앙발래에 있는 수도원은 이때 죽은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세운
수도원이라 한다. 이들은 보통 아가우눔의 순교자들로 기억되고 있다.
 

☞ < 4, 5, 9, 14, 15 > 번은....함께 참조할 내용입니다.

 
 
 
 
    ▶살라베르가(9.22)
 
성인명 살라베르가(Salaberga)
축일 9월 22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수녀원장
활동지역  
활동연도 +665년
같은이름  
 

   뤽세이유의 성 에우스타시우스가 바이에른 여행을 마치고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느 집에서 쉬게 되었다. 그 집에는 맹인 소녀가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살라베르가였다.
그는 이 소녀에게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였는데, 기적적으로 그녀의 시력이 회복된 것이다.

   그 후 성녀 살라베르가는 장성하여 어느 젊은이와 결혼하였으나 두 달 만에 남편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이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계획으로서 자신이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단정하였으나,
부모들은 그녀를 블란디누스라는 사람과 재혼시켰다. 그녀는 다섯 자녀를 두었는데,
그들 중에 보두인과 안스트루다(Anstrudis, 10월 17일)는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이 부부는 이제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각기 헤어졌는데,
성 블란디누스는 은수자가 되고 성녀 살라베르가는 수녀가 되었다.

   성 보도(Bodo, 9월 11일)는 그녀의 동생인데, 성녀 살라베르가가 설득하여 그의 아내는
랑수도원으로 보내고, 성 보도는 수도자로 만들었다. 성 보도는 후일 툴의 주교까지 되었다.
 
 
 
 
    ▶이냐시오(9.22)
 
성인명 이냐시오(Ignatius)
축일 9월 2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활동지역 산티아(Santhia)
활동연도 1686 –1770년
같은이름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성 이냐시오는 1686년 7월 5일 북부 이탈리아 베르첼리 지방의 산티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렌조 마우리지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부유한 벨비소티 가문의 육남매 중 넷째로
자랐다. 그는 훌륭한 신부로부터 초기 교육을 받으며 그로부터 사제직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1710년에 교구 신부로 서품을 받은 그는 6년 동안 사제 직무를 수행한 뒤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때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과 본당 신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성 이냐시오는 카푸친회에서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내적인 평화를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를 따르는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1717년 5월 24일 서원을 한 그는 장상들에게 순명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영적인 여정은 이탈리아 북부 사부아 지방에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복종을 넘어서 그의 형제들을 섬기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였다.
그는 완전히 ‘주님의 의향’을 따랐다. 1727년 성 이냐시오는 토리노 몬테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이 공동체에서 그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영적 지혜를 베풀었다. 그래서 신부들과 영성적으로 성숙한 이들
그리고 타락한 죄인들이 수도원으로 그를 찾아와 죄를 고백하고 영성지도를 받았다.

   1731년에 그는 몬도비의 수도원으로 파견되어 수도원의 총대리 겸 수련장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14년 동안 수련장으로서 자신의 지도에 맡겨진 수련자들이 주님의 진실한 추종자로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순종적인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하는데 유일한 관심을 두었다. 
성 이냐시오의 가르침은 두 기둥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즉 수련자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과 말보다는 행동으로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수련자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함께 해 주었고,
그들의 양성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다.
1744년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눈병으로 인해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고,
그로 인해 수련소를 떠나 토리노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느 정도 치료가 된 뒤에 그는 다시 활동 사도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1743년부터 1746년까지 피에몬테지방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인해 많은 희생자들이 생기고
질병이 돌기 시작하였다. 사르디니아 왕국의 샤를 엠마누엘 3세 왕은 카푸친회 수도자들에게
병원에서 의료적이고 영성적인 지도를 부탁하였다. 그래서 성 이냐시오는 군종신부의 책임자로서
아스티, 비노보, 알레산드리아의 병원에서 복음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2년 동안 활동하였다.

   피에몬테 지방이 평화를 되찾았을 때 성 이냐시오는 토리노 몬테의 수도원으로 돌아와 생의
마지막 24년 동안 영적 지도자와 고해신부로서 지냈다. 그는 병든 이들을 찾아 다녔고 불쌍한
이들을 위해 돈과 먹을 것들을 구하러 다녔다.
“낙원은 게으름뱅이들을 위한 곳이 아니다. 어서 일을 하자!”라고 줄곧 이야기하던 그는
1770년 9월 22일 토리노 몬테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거룩한 길을 안내하였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느끼던 사람들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다시 진정한 신앙에로 이끌었다.
그는 카푸친회 신부로서 특히 충성심, 검소함, 겸손함을 통해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충실했다.
그는 영성적으로 병든 이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죄인과 고립된 이들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그는 1966년 4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5월 1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포카(9.22)
 
성인명 포카(Phocas)
축일 9월 2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정원사, 순교자
활동지역 시노페(Sinope)
활동연도 +303년
같은이름 뽀까스, 포까스, 포카스

 


   흑해 근방 파피아고니아의 시노페에서 정원사로 있던 성 포카는 기도와 관상의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여행자들에게 쉴 곳을 제공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또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을 적극 도왔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트라야누스 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되어 순교하였다.

   한 번은 일단의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 그는 군인들이 쉴 곳을 마련해 주었는데,
그들의 말인즉 포카라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군인들에게 내일 아침에 그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성 포카는 자신의
임종 준비를 마치고 무덤을 판 뒤에 군인들에게 자신이 포카임을 밝혔다.
그때 군인들은 그의 친절한 자세와 용기에 기가 꺾였으나 이미 명령을 받은 자들인지라
그를 참수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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