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에나의 가스파르 백작과 포르토의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난 성 카예타누스는
비첸차에서 세례를 받고, 두 살 때 그의 부친이 전사하는 불운을 안았다.
그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파도바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민법과 교회법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곧 비첸차의 시의원이 되었고, 1506년에는 로마로 가서 교황 율리우스 2세로부터
최초의 공증인으로 임명받았다.
또한 그는 신심 깊은 사제들로 구성된 신애회(神愛會)를 재생시켰다.
1513년 율리우스 교황이 서거하자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
1516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 비첸차로 돌아왔다.
그는 거기서 성 히에로니무스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베로나에서 이와 비슷한 회를 설립하였다.
1523년 그는 로마로 가서 후일 교황 바오로 4세가 된 요한 피에트로 카라파,
바오로 콘시글리에리 그리고 보니파티우스 다콜레 등과 함께 교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에게 설교하며, 병자를 돕고, 최악의 경우에서 허덕이던 성직자의 신분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성직 수도회를 설립하여 1524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승인을 받았다.
테아티노회라 부르는 이 수도회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정규 성직자들로 구성하고,
서원을 발하며, 사목직에 종사하였다. 처음에는 그리 성공적이 못되었다.
1530년 카예타누스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주교들의 개혁에 반대하는 무리들을 대적하여 훌륭한 싸움을 하였고, 이단적인
가르침을 과감하게 물리쳤다. 일반 시민들을 위한 카예타누스의 주요 업적 중의 하나는
전당포의 설립이었다. 후일 그는 복자 요한 마리노니(12월 13일)와 함께
몬테스 피에타티스를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로써 시민들의
복리를 위해 일하였다.
1547년 8월 7일 나폴리에서 운명한 그는 1629년 8월 7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트렌토 공의회 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