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8월3일(月) 聖가믈리엘, 聖니고데모님..등
H-Simon
2009. 8. 2. 20:03
8월3일(月) 聖가믈리엘, 聖니고데모님..등
하느님,
성인 성녀님들과 함께 드리는 기도 가운데,
주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저희에게,
아버지의 한 없으신 사랑으로 강복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리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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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 ..함께 참조할 해당 번호
성 가믈리엘(Gamalielis)은 위대한 율법교사로서
랍비 사회의 최대 칭호인 '라반'(Rabban, 우리 스승)이라 불리었다.
그는 사도 바오로(Paulus)의 교사였고(사도 22,3), 사도들이 산헤드린에서 곤경에 빠졌을 때,
사도행전에 전해지는 유명한 설교를 하여 구출한 분이다(사도 5,34-41).
전승에 의하면 가믈리엘은 그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며,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그의 축일을 8월 3일로 정하였다고 한다. |
묻히시다(요한 19,38-42)
38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39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40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4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42 그날은 유다인들의 준비일이었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 |
예루살렘 유대인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고, 산헤드린의 멤버였던 성 니코데무스는
어느 날 밤에 예수를 몰래 찾아왔다.
그는 예수를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선생님”으로 인정하며, 영생에 대한 질문과 세례에 대하여
담화하였다(요한 3,1 이하).
또한 그는 예수를 두고 논란을 일삼는 바리사이파와 대제관들에게 대하여 예수를 두둔하는
말을 하였다(요한 7,50-52).
또한 그는 예수님 시신에 바르기 위해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많이가져 왔으며,
아리마태의 요셉과 더불어 예수님을 새 무덤에 모셨다(요한 19,39-42).
신약에서는 직접 언급한 바는 없으나 그도 역시 예수의 제자가 되었으리라 믿는 것이다.
한 복음서 외경에 의하면 초세기 교회에서 성 니코데무스의 이름은 자주 회자되었다.
그는 비록 신약성서에 그의 개종이나 순교에 대한 언급이 없었지만 늘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아왔다. |
성 발테오푸스는 영국 잉글랜드 헌팅던의 백작 시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늘 수도생활을 꿈꾸던 중 어머니가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1세와 재혼함으로써
궁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성 아일레드를 만났다.
발테오푸스는 처음에는 궁중생활을 좋아하고 또 어느 여인에게 접근하는 듯 여겨졌으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용감하게 궁중을 나와 수도자가 되기 위해 스코틀랜드를 떠났고,
노스텔의 키르크햄 수도원에 들어가 아우구스티누스 회원이 되었다.
한번은 그가 성탄 미사를 봉헌하던 중 빵을 축성한 뒤에 놀라운 환시에 빠져들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성탄 때처럼 볼 수 있는 성자로 발현하신 것이었다.
자신의 손 안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발테오푸스는 너무나 감격하여 아기 예수께
흠숭지례를 드렸다. 이때부터 그의 성덕은 날로 높아만 갔다.
나중에 그는 시토 회원이 되어 멜로즈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154년 그는 세인트 앤드류의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나, 그의 선출을 반대하는 측의 간계 때문에
결국은 사양하게 되었다.
그는 천상 영광에 대한 환시를 본 위대한 성인이었다. 월테오프로도 불린다. |
아우구스티누스 가조티크는 달마티아의 트라우 태생으로 20세 때에 설교자회 회원이 되었다.
수도서약을 한 후 그는 파리에서 수학하고 귀향하던 중 친구인 야고보 수사는 노상강도를 만나
피살되고, 자신은 일주일간의 부상을 입고 무사히 귀향한 적이 있었다.
그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과 행적을 본받고 또 전파하려고 애썼던 인물이다.
1303년 그는 베네딕투스 11세에 의하여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즉시 교구 개혁을 시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자기 수도원을 중심으로 성서 연구에
힘과 정성을 기울였다.
또 그에게는 치유의 은사가 있어서 많은 주민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또 그는 참피나무를 심었는데, 이 나무는 터키인들이 침입했을 때 기적의 나무가 되어 주민들을
구하였다고 한다. 1702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그에 대한 공경을 재확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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