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7월29일(水) 聖女 마르타, 聖女베아트리체님..등

H-Simon 2009. 7. 28. 17:08

 

7월29일(水) 聖女 마르타, 聖女베아트리체님..등

      

           하느님, 

            성인 성녀님들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

            주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저희에게,

            아버지의 한 없으신 사랑으로 강복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리옵니다....아멘

                                  ****         ****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해당 번호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성녀 루칠라  Lucilla 7월 29일 동정 순교자   +260년
2 루포 ** Lupus 7월 29일 주교 트루아(Troyes) 383-478년
3 성녀 마르타 ** Martha 7월 29일 신약인물,동정녀   +1세기경
4 성녀 베아트릭스** Beatrice 7월 29일 순교자   +304년?
5 빌리암 ** William 7월 29일 주교 생브리외(Saint-Brieuc) +1234년
6 성녀 세라피나 Seraphina 7월 29일   아르메니아(Armenia) +426년
7 성녀 세라피아 Serapia 7월 29일 동정 순교자   +126년?
8 심플리치오 4 Simplicius 7월 29일 순교자   +304년?
9 안토니노 Antoninus 7월 29일 순교자   +260년
10 에우제니오 Eugene 7월 29일 순교자   +260년
11 올라보 Olave 7월 29일 ,순교자 노르웨이(Norway) 995-1030년
12 복자 우르바노 2세** Urban II 7월 29일 교황   1035-1099년
13 칼리니코 Callinicus 7월 29일 순교자 파플라고니아(Paphlagonia) +3세기
14 테오도로 Theodore 7월 29일 순교자   +260년
15 파우스티노  4 Faustinus 7월 29일 순교자   +304년?
16 파우스티노 Faustinus 7월 29일 증거자 스펠로(Spello) +4세기
17 펠릭스 2세 Felix II 7월 29일 대립교황,순교자   +365년
18 프로스페르 Prosper 7월 29일 주교 오를레앙(Orleans) +453년
19 성녀 플로라 Flora 7월 29일 동정 순교자   +260년
총 19 성인

 

   ▶루포(7.29)
 
성인명 루포(Lupus)
축일 7월 2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트루아(Troyes)
활동연도 383-478년
같은이름 루뽀, 루뿌스, 루푸스
 
   프랑스의 툴(Toul) 태생인 성 루푸스는 아를(Arles)의 성 힐라리우스(5월 5일)의 여동생인 피메니올라와 결혼하여 6년을 살았으나, 하느님을 섬기려는 열망을
이길 길이 없어서 서로 합의하여 헤어졌다.
성 루푸스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레렝스 수도원으로 가서 성 호노라투스(1월 16일)의 지도를 받았다.

   426년에 그는 트루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주교직을 수행하면서도 겸손,
고행, 청빈 등 수도자의 기본적인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아 큰 존경을
받았다. 그는 극히 검소한 의복 외에는 입지 않았으며, 나무판자 위에서 잠을
잤고, 개인 기도를 바치는 시간이 많았으며, 거의 매일 단식하였다.

   429년에 오세르의 성 게르마누스(7월 31일)가 펠라기우스 이단과 싸우기
위하여 영국으로 갈 때 그도 성인과 동행하였다.
두 주교는 기도와 설교 그리고 기적 등을 통하여 오류를 바로잡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이러한 공로 때문에 성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 8월 21일)는
그를 이렇게 칭송하였다.
“사제들 중의 사제요, 주교들 중의 주교요, 프랑스 지방의 최고 성직자이며,
윤리의 기준이고 진리의 기둥이며, 하느님의 친구이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대리자이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채찍’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 후 그는 산중에서 은수자로 생활하였고, 관상생활만 하다가 운명하였다.

 

   ▶마르타(7.29)
 
성인명 마르타(Martha)
축일 7월 29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신약인물, 동정녀
활동지역  
활동연도 +1세기경
같은이름 마르따, 말따

   Christ in the House of Mary and Martha


   성녀 마르타는 성녀 마리아(Maria)와 성 라자루스(12월 17일)의 누이이고
예루살렘 근교 베타니아에서 살았으며 집안일을 맡았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였으며, 주님은 그들의 집에 자주 머무신 듯하다.
성녀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성이었던 것 같다.

   루가 10장 38-42절의 사건은 그녀의 성격을 잘 묘사하는 내용이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이런 기사 때문에 그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성녀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처럼 공경을 받는다.
성 라자루스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 연락했던 이는 성녀 마르타이고,
성녀 마리아는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요한 11,20).
어떤 전승에 의하면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루스는 예수님의 사후에 프랑스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녀이다.

 
 
 
 
 
   ▶베아트릭스(7.29)
 
성인명 베아트릭스(Beatrice)
축일 7월 29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304년?
같은이름 베아뜨리체, 베아뜨릭스, 베아트리체

 


   성 심플리키우스와 파우스티누스는 형제지간으로 이방신에게 희생 바칠
것을 거부함으로써 체포되었다.
그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참수되었는데, 시신을 티베르 강에 던져버렸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그들의 여동생인 성녀 베아트릭스(베아트리체)가 오빠들의
유해를 건져 포르토(Porto)로 가는 길에 있는 제네로사 묘지에 안장하였다.

   그 후 베아트릭스는 루시나라는 부인과 함께 살다가 이웃 사람의 고발에 의하여 체포되어 집정관 앞으로 끌려가서 이방 신전에 희생을 드리도록 강요받았다.
이때 그녀는 완강히 버티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이리하여 그녀 역시 순교의 월계관을 쓰고 오빠 곁에 묻혔다.
 이들의 유해는 7세기의 성 레오 2세 교황의 주선으로 산타 비비아나 성당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8번, 15번 형제자매 성인님들을...같은 내용으로 함께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빌리암(7.29)
 
 
성인명 빌리암(William)
축일 7월 2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생브리외(Saint-Brieuc)
활동연도 +1234년
같은이름 굴리엘모, 빌헬름, 윌리암, 윌리엄
 
   성 빌리암의 덕행과 기적들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생애는 구름에 가려진
듯하다. 그는 생브리외의 주교 요셀리누스에 의해 사제로 서품된 후
그의 후계자가 되어 주교로 축성되었다.
가난이 그의 재산이었고, 자신의 소유물뿐만 아니라 구제를 위해서는 곡물이나 다른 필수품을 빌리기까지 하였다.
그의 행동 원칙은 화해와 기도의 정신이 그 밑바탕을 이루었다.

   그는 교회의 권익을 가로채려는 브르타뉴의 공작 베드로 모클레르로에게
끝까지 항거하다가 2년 동안 유배를 가야했다.
이때 그는 푸아티에에 피난처를 마련하고 극도의 회개생활을 하였다.
1230년 그가 생브리외로 돌아와서 4년 동안 활동하가다 선종했는데,
1248년에 그의 유해를 대성당에 안장할 때까지 성인의 유해가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247년 또는 1253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윌리엄으로도 불린다.
 
 
 
 
   ▶우르바노 2세(7.29)
 
성인명 우르바노 2세(Urban II)
축일 7월 29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교황
활동지역  
활동연도 1035-1099년
같은이름 어번, 우르바누스, 우르반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Urbanus II)


   프랑스의 귀족 가문의 후손인 외드 드 샤티용쉬르마른은
1035년경 샹파뉴 지역 샤티용쉬르마른에서 태어나 랭스의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성 브루노로부터 신학을 배웠으며, 이곳에서 1055년경부터 대부제로 일하였다. 1070년경 클뤼니 수도원에 입회하여 성 후고의 지도하에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 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요청으로 로마로 파견되어 교황의 교회 개혁
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1078년 오스티아의 주교 추기경이 되었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수석 보좌관이 되었다. 또한 1082-1085년에는 프랑스와 독일에 대한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다. 이때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1088년 3월 12일 빅토르 3세(9월 16일) 교황을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우르바누스 2세로 이름을 정했다.

   그러나 그는 대립교황인 클레멘스 3세의 등장으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1089년 가을 70명의 주교들이 멜피에 모여 시노드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성직매매와 성직자 혼인을 반대하는 선언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1090년 마침내 로마의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1095년 이탈리아 피아첸차에서 개최된 시노드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에게
내린 파문이 정당함을 확인해주었다. 교황은 그해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의
노트르담 두 포르 성당에서 개최된 시노드에서 1089년의 칙령을 재확인하는
한편 ‘신의 휴전’(Treuga Dei)을 처음 선언하였다.
또한 본처를 두고 재혼한 프랑스의 필리프 1세를 간통죄로 파문하였다.
그는 클레르몽에서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하도록 호소하고 격려함으로써
십자군 규합에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그 사이 다시 클레멘스 3세가
차지하고 있었던 로마에 당당히 입성하였다.
이리하여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교황권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결국 하인리히 4세 황제는 이탈리아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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