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귀족 가문의 후손인 외드 드 샤티용쉬르마른은
1035년경 샹파뉴 지역 샤티용쉬르마른에서 태어나 랭스의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성 브루노로부터 신학을 배웠으며, 이곳에서 1055년경부터 대부제로 일하였다. 1070년경 클뤼니 수도원에 입회하여 성 후고의 지도하에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 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요청으로 로마로 파견되어 교황의 교회 개혁
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1078년 오스티아의 주교 추기경이 되었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수석 보좌관이 되었다. 또한 1082-1085년에는 프랑스와 독일에 대한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다. 이때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1088년 3월 12일 빅토르 3세(9월 16일) 교황을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우르바누스 2세로 이름을 정했다.
그러나 그는 대립교황인 클레멘스 3세의 등장으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1089년 가을 70명의 주교들이 멜피에 모여 시노드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성직매매와 성직자 혼인을 반대하는 선언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1090년 마침내 로마의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1095년 이탈리아 피아첸차에서 개최된 시노드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에게
내린 파문이 정당함을 확인해주었다. 교황은 그해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의
노트르담 두 포르 성당에서 개최된 시노드에서 1089년의 칙령을 재확인하는
한편 ‘신의 휴전’(Treuga Dei)을 처음 선언하였다.
또한 본처를 두고 재혼한 프랑스의 필리프 1세를 간통죄로 파문하였다.
그는 클레르몽에서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하도록 호소하고 격려함으로써
십자군 규합에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그 사이 다시 클레멘스 3세가
차지하고 있었던 로마에 당당히 입성하였다.
이리하여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교황권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결국 하인리히 4세 황제는 이탈리아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