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4일(火) 聖 가밀로 데 렐리스司祭,
聖 프란치스코 솔리노님..등
하느님,
성인 성녀님들의 아름다운 삶을 배워,
주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저희에게,
아버지의 사랑과 평화로 강복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리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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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 함께 참조할 해당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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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복치아니코에서 출생한 성 카밀루스(또는 가밀로)는 군인으로서
터키인들을 대항한 베네치아를 위하여 전투에 참가하였고, 도박에 빠졌으며, 1574년경에는 무일푼의 신세가 되어 나폴리 거리를 방황하였다.
그는 몸이 건장하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1575년 우연히 설교를 듣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서,
두 번씩이나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려고 노력했으나 일생동안 그를 괴롭힌
다리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이기는 방법의 하나로 다른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정력을 쏟았으며, 로마의 산 자코모 병원에 자원으로 봉사하다가 곧 그 병원의
회계를 맡았다.
이러한 경험은 병원의 놀라운 상황과 제 문제점들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고해신부이던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5월 26일)의
권고를 받아들여 158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이미 사제와 평수사들로 회를 구성하였던 병자들의 봉사자회를 세웠다.
그들은 로마의 주요 병원에서 사목하다가 1585년에는 자신들의 병원을
세웠으며, 특히 로마 항의 배들을 통하여 전염되는 흑사병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치료하였다. 그는 항상 창문을 열어 놓고, 적당한 음식물을 먹게 하고,
전염병일 경우는 격리하는 방법을 그는 활용하였고, 그의 사제들은 항상 숨을
거두는 환자들 곁에 있었으며, 임종자들의 장례 등에도 큰 관심을 보이게 하여
세인들의 칭송이 높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 도저히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1607년에 자신의 장상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늘 환자들을
방문하면서 자신이 죽는 날까지 그렇게 하다가 제노바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742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이어 1746년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또한 교황 레오 13세에 의하여 천주의
성 요한(3월 8일)과 함께 모든 병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고,
교황 비오 11세로부터는 모든 간호사와 간호 단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
클뤼니의 성 울릭(Ulric) |
이교도로 태어난 성 울릭은 젊어서 궁성에서 지냈으나 그의 삼촌인 독일
프라이징의 주교 노트케르를 만난 뒤에는 세속적인 야심을 모두 버렸다.
그 후 그는 사제가 되었으나 크게 만족하지 못하고 로마와 예루살렘을
순례하였는데, 이때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고자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1052년에 클뤼니의 성 후고(4월 29일)로부터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복을 받았다.
그는 재능이 뛰어난 수도자였기 때문에 새 수도원의 건축이나 교황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화합을 위하여 늘 동분서주하였다. 하지만 그는 수도원
생활의 엄격성을 회복하는데 기울인 노력 때문에 더욱 위대한 수도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한 번은 어느 수도자가 울고 있는 그를 보았다.
“나는 내 죄 때문에 웁니다.” 또한 그는 클뤼니 수도원의 회헌을 비롯하여
세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만년의 2년 동안은 맹인으로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
카스파르 데 보노는 1530년에 에스파냐의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너무나 가난하고 또 평범한 분들이었다.
그가 성장하자 가계를 도우기 위해 비단 장사를 떠났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장사를 그만두고 군인이 되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성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였으며,
많은 시간을 기도와 묵상으로 지냈다.
이리하여 그는 주님의 은총으로 확신을 얻고, 수덕생활을 목표로 삼고
군대를 떠나려 하였지만 쉽게 놓아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어느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는데, 이때 그는 회복되기만
하면 미님스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하고, 나중에 회원이 되었다.
이 수도회는 대단히 엄격하였지만, 그의 장상이자 설립자인 바울라의
성 프란치스코는 성 카스파르의 높은 성덕을 즉시 알아보았으며, 또 그를 다음
해에 사제로 서품하였다.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는 늘 육체적인 여러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발적인 고행을 배가하였다.
그는 1604년에 발렌시아에서 운명하였고, 1786년에 시복되었다. |
프란치스코 회원인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는 에스파냐의 안달루시아에서
태어났으며 1589년에 남아메리카 중부 페루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가 타고 가던 배가 폭풍우를 만나 포기해야 했지만 그는 몇몇 흑인
노예들과 함께 끝까지 배를 지키려고 하였는데, 결국에는 그 노예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지는 경험을 하였다.
그는 남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인디언들 가운데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다른 어떤 유럽 성직자와는 달리 각 지방의 토착 언어를
열심히 배웠고, 또한 언어의 특은을 입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604년 그는 리마의 어느 시장에서 그 도시의 부패상을 폭로하는 설교를
하였는데, 그 설교가 너무나 강력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시 당국은 그 지방의 대주교에게 공식 항의하였고, 그는 군중들을
진정시켜야만 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거의 20년 동안 인디언과 에스파냐 정복자 사이를 오가며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여 훌륭한 수도자의 상을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1610년 7월 14일 페루의 리마에서 선종한 그는 1675년 6월 20일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12월 27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